[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36. 태릉선수촌 <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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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태릉선수촌 건립 공사는 몇 단계에 걸쳐 진행됐다. 사진은 1967년 4월 26일 열린 선수 합숙소 기공식 모습.

1970년 6월 30일 청와대에서 편지가 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써 보낸 편지였다. 거기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그간에는 시간이 없어서 면담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추진 중인 아이스링크 공사와 수영장 공사비 잔액은 사정이 매우 딱한 줄 압니다만, 지금 이같이 많은 금액을 정부에서 염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명년도 예산에나 반영되도록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꼭 필요하다면 저질러 놓고 보라"는 박 대통령의 말만 믿고 아이스링크와 수영장 건설을 밀어붙였는데, 정부 예산 염출이 어렵다니. 나는 줄담배를 피우며 고민을 거듭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내 스타일 대로 밀고 나가자. 가만히 앉아만 있어서는 아무 일도 이뤄지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대통령 집무실이라도 찾아가 떼를 써 볼 참이었다. 결심하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게 내 스타일이다. 나는 그날로 청와대의 이후락 비서실장, 공화당의 길재호 사무총장과 김성곤 재정위원장을 방문했다.

나를 맞은 사람들은 모두 기세등등한 내 태도에 불안해하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해 들은 얘기인데, 당시 나는 만약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듯한 기세'였다고 한다.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실질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은 김성곤 재정위원장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난 내 형 중산(민완식)과 유도를 함께한 친구 사이였다. 나를 친동생같이 살갑게 대했다. 김 위원장과 나 사이에는 태릉선수촌 공사비 지원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형님, 태릉에 훈련시설을 짓느라고 빚을 많이 졌습니다. 외상 공사비를 좀 갚아 주셔야겠습니다."

내가 인사를 마치자마자 대뜸 요구사항부터 꺼내자 김 위원장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이때 나는 김 위원장에게 "만약 공사비를 갚아 주지 않으면 제가 거느리고 있는 부대를 데려오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 말에 김 위원장은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는 의아해했다. "아니, 자네는 군인도 아닌 사람이 무슨 부대를 어떻게 데려온다는 거냐"면서. 내게는 미리 준비해둔 대답이 있었다. 나중에 아주 유명해진 말이다.

"제가 체육회장 아닙니까. 사격부대.복싱부대.레슬링부대.유도부대… 이런 게 다 제 부대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일당백이지요."

결국 김 위원장은 정부 예비비로 태릉선수촌의 외상 공사비를 갚아주었다. 나는 김성곤 재정위원장이 나의 '협박' 때문에 공사비를 해결해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 위원장에게는 나에 대한 애정과 한국 스포츠의 미래에 대한 공감, 나를 도울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김 위원장은 분명히 청와대에 있는 박 대통령에게도 나와 면담한 내용을 보고했을 것이다. 결국 박 대통령의 결심으로 지원이 이뤄진 것이다. 결재 사인을 하면서 박 대통령은 아마 웃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박 대통령과도 승강이를 벌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태릉선수촌 공사가 한창이던 어느 날의 일이다. 박 대통령은 태릉컨트리클럽으로 골프를 치러 가다 아름드리 나무가 잘려나간 것을 발견했다. 박 대통령은 선수촌 건설을 허락하면서 내게 "한 그루의 나무도 상하지 않게 하라"고 당부할 만큼 산림 녹화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당장에 공사 중단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이튿날 청와대로 달려갔다. "선수촌 없이 어떻게 선수를 키웁니까. 공사를 하다 보면 나무 몇 그루 잘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하고 설득했다. 박 대통령은 나무를 아끼라고 신신당부하며 공사 재개를 허락했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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