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공공이익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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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올해는 유난히도 신년벽두부터 「규제」와 「해제」를 주제로 한 이슈들이 빈발하고 있어 흥미롭다.
정치쪽에서는 다수의 정치활동 피규제자들이 「해금」되었고 경제쪽에서는 80년의 중화학조정이 단계적으로 해금되었다. 적어도 경제쪽에서만 보면 해금된 것은 중화학 뿐만이 아니다.
지난해에 정부안의 「중지」를 모아 입안되고 공표되었던 부동산투기종합대책의 주요항목들이 올들어 슬그머니 해금되었다. 당장의 소용에 닿지않는 땅보유를 「규제」한다는 명분으로 공한지중과세대상을 넓히려던 계획이 「해금」되었고 콘더미니엄이나 별장등에 중과세 하겠다는 규제대책도 해금되었다.
국영기업의 획기적인 경영쇄신을 위해 부사장·전무직을 없애는등 대폭으로 직제개편 하겠다는 구상이 원상복귀했고 수도권인구「규제」를 위한 행정부처 대전 이전계획이 「해제」되었다. 경제에서는 그러나 해금과 해제, 백지화만 있었던게 아니라 그 반대도 있었다. 중화학통폐합이 완화되는 한편에서는 해운업계의 통폐합이 올들어 새롭게 착수되었다. 70여개로난립한 해운사들을 당초에는 10여개로, 지금은 20여개로 통폐합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경제에 관한한 규제와 통폐합, 해재와 자율화라는 주제는 「스미드」이래의 변함 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고 아직도 결말이 나지 않은채 이즈음의 점잖은 학자들, 예컨대「갤브레이드」와 「프리드먼」처럼 서로 앙숙을 만들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필자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이 같은 경제적 규제와 자율의 효율, 또는 비능율의 입증이 아니라 그 윤리적 측면이다.
적어도 행정력이 개입되는 경제적 규제와 완화에는 최소한의 가정, 즉 행정력의 선의와 공공이익에 대한 끊임 없는 관심이 뒷받침되어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런 전제가 흔들리거나 부차적으로 고려된다면 행정이나 정책의 효율과는 상관없이 정당화되기 어려운 것이 된다.
「권력이 천사의 손에 있다면 구성원들에 선한 일을 할수 있을 것」(프리드먼)이라는 극단적 불신론은 예외로 치더라도 현대의 행정과 관료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힘의 집중도가 심화될수록 공공이익에 대한 사회의 관심도는 비례적으로 높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높은 관심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공공이익의 추구가 자명의 공리처럼 내세워져 있을 뿐 그 실체를 가름하는 기준은 매우 모호하다.
우리는 그예의 하나를 부동산투기「억제」대책의 입안과 철회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강력한 행정과 제도의 「규제」장치를 만들어 부동산투기를 억제한다는 논리도 기본적으로는 공공이익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규제수단의 주요골격의 하나였던 공한지세중과확대와 사치성 별장·콘더미니엄의 과세강화를 철회하는 논리도 역시 공공이익이었다.
정부 여당의 설명으로는 이 두가지 조세강화는 이른바 「중산층」에 대한 과중한 부담이될것으로 판단되어 백지화한다고 밝혔다. 이런경우 공공의 이익은 어느쪽이 진짜인지 판단키 어렵게 된다. 이와 유사한 논리에서면 모든 사회적 기득권은 당연히 변화하지 않아야 하며 그것이 아무리 소수집단이라해도 사회적 영향력에 따라 공공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다양한 주장을 판단하는 것은 관료들이다.
산업계의 통폐합과정에서도 이와 유사한 판단의 혼란을 겪게된다. 통폐합의 논리도 자원낭비와 비효율을 막는다는 공공적 배려가 깔려있다. 그러나 그것을 백지화하는대도 경쟁화에 따른 산업효율의 증대라는 공공적 배려가 제시된다.
경제행정이나 정책은 이처럼 언제나 그 추구하는 목적에 관계 없이 수단으로서의 양면성을 지니게 되므로 관료의 선의와 공공의식의 중요성은 그만큼 증대되는 것이다.
소관부처의 입장과 기득권에 집착하거나 해운업계의 통폐합에서 보는 것처럼 관료적 실적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의 공공성이란 오히려 「국가를 도구화하는 관료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김영하 <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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