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의 밀교적 쟁토관 드러내|신현숙 교수가 밝힌 태장 만다라와 석굴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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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경주 석굴암이 석가원을 중심으로 한 태장 만다라의 원형임을 밝혀낸 신현숙교수 (동국대 불교학)는 『신라가 밀교로써 국가통일을 도모한 기록이나 유적이 도처에 있으면서도 그동안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소홀했던 점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라인의 밀교적 불토관에 좀더 빨리 착안했더라면 석굴암의 정체는 보다 빨리 밝혀졌을 것.』 이라고 지적했다.

<만다라의 세계와 석굴암의 구조>
태장 만다라와 경주 석굴암을 비교, 신교수가 밝혀낸 사실은 이렇다.
태장 만다라는 화엄의 불국토관인 연화장 세계를 기본으로 부처와 보살이 모두 연화 위에안치돼 있다. 현재 경주 석굴암의 모든 부처 보살은 연화위에 앉아 있다.
태장 만다라의 중대엔 8잎의 연위에 중앙·동·서 남·북으로 불상이 앉고 그 사이에 협시 보살이 앉아 팔각을 이룬다.
석굴암은 광대무변의 상징인 대일을 불상 정 뒷면에 둥근 연화(광배)로 나타내 중앙에 있어야할 비노차나불을 대신했다. 석가모니불을 팔각 좌대 위에 앉혔다.
태장 만다라 중대 중앙불은 비로자나불 또는 대일여래가 안치되나 원래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는 석가모니불의 덕상을 나타내는 같은 법신체다. 석굴암은 대일여래의 상징을 불상 정 뒷면의 광배와 천장 중앙과 8각 좌대에서 나타내고 석가모니불을 앉힌 것이다. 태장 만다라 12원의 주보살 및 협시보살을 석굴 양벽 상부의 10개 소굴에 안치하고 양벽 하
단엔 석가여래의 협시보살과 나한 (10대제자) 을 두어 문수원까지 모두 배치했다.
상부 10개 소굴에 안치된 보살과 태장 만다라 각원의 주 보살을 대조해 보면 ⓛ소실지원의주보살인 + - 면관자재 보살은 석가여래의 정 뒷면, 대일의 상징인 광배 아래에 배치하고 ②중모의 협시보살인 문수와 보현, 지장원의 지장보살, 편지원의 일절여내지인의 협시인 우누빈나가섭을 석굴암 남쪽에 배치했다. 중모의 협시보살인 관자재보살과 미륵보살, 제개장원의 제개장보살의 협시보살인 부사의자보살, 금강수원의 금강살매보살을 석굴암 북쪽에 배치했다.
관자재보살과 미륵보살의 위치를 바꾼 것은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③현재상부 앞폭 두 굴은 보살상이 없다. 지명원의 반야파나밀보살은 편지원의 일절여내지인의 보살로서 석굴암 북쪽의 앞면에 두고 허공장원의 허공장보살은 남쪽 앞면에 둔 것으로 보인다.
④편지원의 주인인 일절여내지인의 정삼각형은 석가모니불의 바로 앞에 안치된 것 으로보인다. 석가여래의 좌대를 중앙에 두지 않고 뒷면에 치우쳐 세웠던 점에 대한 궁금증의 실마리가 풀린다.
⑤석가원과 문수원을 중심으로 10대제자와 문수·보현· 제석천왕· 대범천왕을 석굴 양벽에 배치하고 사천왕을 제1문과 제2문 사이에 배치했으며 외금강부원의 금강력사와 팔부중을 배치함으로써 석굴암은 석가원을 중심으로 재현된 완전한 태장 만다라의 원형이다.

<밀교의 신라전래>
밀교가 신라에 들어온 것은 승명랑에 의해서다 (『삼국유사』). 그는 671년 경주 양산의 신유림에 밀단을 만들고 문두루(진언)의 비법으로 당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전한다. 신유림에 남아있는 사천왕사지는 명랑의 밀단이었다는 설도 있다.
신라통일의 명장 김유신과 함께 세운 원원사는 통일신라초기 만다라 비법 (문두루)의 중심도량이기도하다. 이밖에 밀교만다라로 이름을 떨친 신라명승은 혜통·부가사의· 혜초 · 현초 등이다. 특히 승 부가사의 는 신라에 태장 만다라를 최초로 도입했다.

<김대성과 석굴암>
『삼국유사』엔 김대성이 전생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창하고, 현세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불국사는 김대성의 초창이 아닌 중창이며 석굴암은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원효는 저서 『유심안악도』 에서 태장 만다라의 진언을 외면 왕생극락케 된다고 했으며 『아미타경소』에선 밀교의 경전을 인용, 아미타여래는 태생이 아닌 자연화생이며 최상극락정토는 석가여래의 연화장계임을 주장했다.
원효의 이러한 정토관은, 김대성이 전생부모를 위해 태장 만다라를 석굴암에 펼칠 때 석굴전체를 한 송이 연꽃으로 만들고 동방 제1문을 석왕문으로 세웠으며 석가원을 중심으로 12원의 주 보살을 안치, 세계 제1의 석굴 만다라를 창건한 사상적 배경에서 더욱 돋보인다고 신교수는 지적했다.

<학계의 석굴암 연구>
그동안 학계의 석굴암연구는 신앙적 측면과 건축공학적 측면에서 이뤄졌으나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건축공학적으론 왜 본존불이 중앙에 위치하지 않았나 하는 문제도 해명되지 않았으며 특히 신앙적인 측면에선 석굴암 전체구조에 대한 정체를 풀지 못한 채 주로 본존불에 대한 논의에서 맴돌았다.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세과 아미타불세로 나뉘어 주장됐는데 석가모니불일 경우 팔각좌대 등이 문제가 됐고, 아미타불일 경우 주변의 보살들을 설명할수 없었다. 석굴암 전체에 대한 해석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근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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