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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 지령한 김정일 해주까지 마중|영화 주연 미끼 홍콩에 유인|최은희·신상옥부부 ″증발〃에서 ″평양출현〃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돈과 환락, 마약과 국제음모가 활개치는 항구 도시 홍콩의 미스터리. 한국 연극·영화의3O년 히로인 최은희와 명감독 신상옥의 78년 홍콩 증발사건이 6년 만에 베일을 벗었다. 『김일성 생일에 최은희를 참석 시켜라』-. 이들 두 유명인의 실종은 북괴 김정일이 조직한 예술인 전문 국제 납치단의 사전 계획된 치밀한 납치극 이었다. 78년1윌14일 하오5시, 홍콩 프라마 호텔 1612호실에서의 모습을 끝으로 6년 만에 북한 땅 관광지에 나타난 최은희·신상옥. 당국 발표를 근거로 서울∼홍콩∼평양을 잇는 북괴의 납치경위를 밝힌다.

<최은희 납북><지령>
77년8월초 김정일은 대남 공작 담당 부부장 강해룡(58)를 불러 최은희·신상옥을 납치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것은 김정일이 성적 매력을 강하게 느끼고 납치를 기도했던 재불 영화배우 윤정희의 유고 자그레브 공항 납치 미수 사건 며칠 뒤였다.
김정일은 윤정희의 납치가 실패하자 평소 전형적인 한국 여인상을 지닌 여배우로 호감을 갖고 있던 최은희를 지목한것.
강해룡은 홍콩거점 공작책 이상희(58)에게 김의 지령을 즉각 하달했다.
77년9월 이는 하수인 신필림 홍콩지사장 김규화(62·간첩죄로 징역15년 확정 복역중)에게 최은희를 홍콩으로 데려오는데 필요한 초청장을 입수하라고 지시했다.

<유인>
한편 이는 김규화를 통해 홍콩거주 영화 브로커 왕동일(57)을 홍콩달러 7천달러에 매수하여 하수인을 만들고 왕으로 하여금 한국에 입국, 최은희를 만나 77년12월 개최 예정인 홍콩카니발에 참가해달라는 구실로 홍콩으로 유인 하도록 했다.
왕이 서울에 들어온 것은 77년6월29일. 왕은 서울 충무로2가 대원호텔 남산동 퍼시픽 호텔 및 안양 예술학교 등지에서 최은희 김희갑 태현실 등을 만나 3명이 카니발에 참석하겠다는 대답을 듣고 10월13일 홍콩으로 돌아가 유인 성공 사실을 이상희에게 보고했다.

<출국>
77년10월 김규화는 이상희 지시에 따라 홍콩 영화 제작업자인 김정 영업공사대표 시조흠(47)으로부터 이 회사 명의의 최은희 초청장을 입수, 이 에게 제공.
한편 왕동일은 그해 11월 이의 초청에 따라 최은희에게 『홍콩 카니발은 현지 사정으로 취소 되었고 홍콩영화 「양귀비」의 주연을 맡기려고하니 와서 상담하자』고 유혹, 승낙을 받은뒤 11월말 최에게만 초청장과 비행기표를 우송했다.
이 술책에 말려든 최은희는 78년1월11일하오7시 CPA411편으로 출국, 같은날 하오10시쯤홍콩 카이탁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김규화, 왕동일, 중국인 영화브로커 이영생등이 나와 최은희를 맞았고 홍콩 사이드의 프라마호텔 1612호에 투숙했다.
이틀후인 1월13일 구룡소재 국빈반점에서 김규화 이상희모녀·이영생부부 등과 저녁을 먹은 최는 당시 안양 예술학교장 강정희씨에게 1월20일 귀국하겠다는 국제전화를 한 뒤 이상희의 안내로 프라마 호텔로 돌아갔다.

<납치>
다음날인 1월14일 하오5시쯤 최는 『양귀비』출연 계약과 안양 예술학교 신축 기금 관계로 이상희의 남편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또 하오 7시30분에는 재 홍콩 영화감독 정창화씨와 저녁약속이 되어있었다. 최는 호텔로 찾아온 이상희로부터『남편이 유람선에서 기다리고있다』는 말을 듣고 택시로 선창가까지 함께 갔다.
그들은 모터 보트로 옮겨탔다. 10분쯤뒤 최는 정박중인 큰 배로 올라갔다. 북괴 공작선 능라도호 였다.
최은희를 태운 납치 공작선이 해주항에 입항 했을때 김정일은 대남 공작 담당비서 김중인·연락부장 정경희를 대동하고 해주항까지 직접 나와 최를 마중했다.
김정일은 최가 하선하자 그의 밴츠 승용차에 태워 평양까지 동행했다.

<신상옥 납북>
최은희 납치 성공 13일 뒤인 78년1월27일 하수인 김규화는 서울의 신상옥에게 『최은희가 실종 되었다』고 국제 전화를 걸고 『홍콩으로 급히 오라』고 유인했다.
신감독은 다음날 서울 신필림에 최의 행방불명을 가족에게 알리라고 전화를 한뒤 홍콩을 떠나 미국·일본·호주·싱가포르·인도네시아·프랑스등을 전전하며 해외영화계 친지들을 통해 최의 행방을 탐문했다.
아무런 실마리를 찾지 못한 신감독은 78년7월14일 홍콩으로 다시 돌아가 최의 행방을 계속 수소문하던 중 7월19일 신감독 뒤를 따르며 기회를 보던 북괴 공작원에 의해 그들의 조직이 활동하기 좋은 홍콩에서 행동, 공작선 편으로 납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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