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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 정신대 노수복 할머니 회한의 일대기〈9〉|제2의 인생|고무중개상 집에 가정부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말레이지아 이포시에서 방황하던 어느 날.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누군가가 등뒤에서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40대의 점잖아 보이는 말레이지아인 신사였다.
「모하메드」라고 자신을 먼저 소개한 이 신사는 뭐라고 말을 걸어왔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주춤주춤하자 그는 손짓 발짓으로 자기를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순간 덜컥 겁이 나기는 했으나 부드러운 미소와 좋은 인상을 보고 일단은 안심했다.
나는 우선 가자는대로 따라 가보기로 했다. 사실은 나로선 주저해야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평화로운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을 겪든지간에 전쟁을 하며 이동하는 일본군을 따라 정신대 생활을 강요당했던 고생보다야 더할 것이 있으랴 싶었다.

<독실한 회교신도>
그는 내가 안심하는 표정을 짓자 『세레마브 다당. 세레마브 다당 (따라와요) 』이라고 손짓했다.
내가 따라간 곳은 비교적 부유해 보이는 「모하메드」씨의 집이었다.
「모하메드」씨는 이포시에서 고무중개업을 하는 독실한 회교신도였다.
부인과 5자녀 등 모두 7명의 가족이 그 집에 살고 있었다.
그는 회교도 율법이 허용하는 대로 이미 3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첫째, 둘째 부인은 각각 시내 다른 장소에서 살고 있었고 내가 간 집은 셋째 부인 집이었다.
「모하메드」씨는 나에게 집에서 잔일을 하며 부인을 거들어 달라고 했다. 나로서는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열심히 일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밤늦게까지 몸을 아끼지 않았다. 빨래를 해도 신이 났고 청소를 해도 즐거웠다. 5자녀의 시중을 들어도 귀찮지 않았다.

<밤잠 안자고 일해>
정신대에 있을때 빨래는 일본군 병사의 군복을, 그것도 하루 수십벌을 빨아야 했었고 청소도 군인 막사를 돌며 갖은 수모를 받으며 했어야 했다.
거기에다 걸핏하면 매질이나 발길질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생활이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모하매드」씨는 흡족해했다.
남자아이들은 나를 「코리· 마마」(한국어머니) 라고 부르며 무척 따랐다. 나는 오랜만에 생활에서 오는 행복을 맛보았다. 나는 그런대로 행운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포로수용소에서 들은 얘기론 나처럼 정신대로 끌려온 한국여인들은 18만명이나 된다고 했다. 또 정신대생활을 하다 죽어간 한국사람이 8만명 이상이라 했다.
18만명이란 1백만명의 도시 전체 가구가 그 희생자가 되었다는 셈이다. 그같은 끔찍한 비극 속에서 나는 지금 살아남은 몇 사람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매일 이처럼 이 집에서 남의집살이로만 그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내로 나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깐」이라 불리는 이곳 대중음식점의 음식종류나 조리법 등을 알아보고 주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음식점·큰 식당이 아니라 포장마차 같은 간이음식점이라도 하나 갖는 것이 독립할 수 있는 길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모하메드」씨 집에서 1년 가까이 지냈을 때였다. 어느 날 그가 날 부르더니 『나가서 독립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그는 내가 틈틈이 다른 일거리를 찾고 있는 것을 알고있기는 했겠지만 전쟁이 끝난 후 고무중개업이 잘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있던 터였다.
내가 「모하메드」씨 집을 떠나던 전날 저녁에 평시보다 조금 나은 음식상을 차려놓고 온가족들이 모였다. 나는 목이 메어『데리마 자시, 데리마 자시(고맙습니다)』라고 밖에 할말이 없었다.

<주석광산 찾아가>
「모하메드」씨는 나에게 『지금 남태 지역에 주석광이 발견돼 경기가 좋으니 거기가면 일거리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내가 그 집을 떠날 때 「모하메드」씨는 뿌리치는 나의 손에 한사코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었다.
나는 다시 『데리마 자시』를 되풀이하며 눈물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날 문밖에서 손을 흔들며 나를 떠나보내던 「모하메드」씨의 아이들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1년만에 다시 태국으로 갔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 도달한데가 바로 이곳 핫차이시다.
【핫차이(태국)=전종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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