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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의 미니 월드컵' 후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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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영국 연합군의 공습으로 쑥밭이 된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포연이 걷히자 하나둘씩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공터에 모여 공을 차기 시작했다. 미군 병사들도 함께 공을 쫓아다녔다. '공차기'는 이렇듯 인간의 원초적인 '유희 본능'을 대표한다.

25일 오후 한강 광나루 시민공원 축구장에는 다양한 피부색과 머리 모양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큰 키에 검은 피부로 패트릭 비에이라를 연상시키는 프랑스인, 하산 사슈를 닮은 박박머리의 터키인, 이번 시즌 유럽축구연맹(UEFA)컵 준우승팀 셀틱(스코틀랜드)의 녹색 가로줄 무늬 유니폼을 입은 금발머리 젊은이…. 엉성하긴 해도 월드컵 분위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주한 외국인 축구리그인 '수퍼 선데이 풋볼리그'의 올스타전 풍경이었다. 모두 10개 팀이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순위를 가리는 리그는 전반기를 끝냈고, 이날 특별 이벤트로 올스타전이 치러졌다. 다섯 팀씩 묶어 '비 더 레즈(be the reds)'와 '팀 파이팅(team fighting)'으로 이름을 붙였다.

경기는 격렬했지만 유쾌했고, 수준도 상당히 높았다. 광나루 축구장은 맨땅인 데다 70m×4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규격 미달'의 구장이다.

선수들이 뻥뻥 내지른 공은 터치라인을 따라 주차해 있는 차량들을 잇따라 강타했고, 그때마다 "오! 노"하는 비명과 웃음이 터졌다. 주인을 따라온 개 한 마리가 경기장에 뛰어들어 주인의 결정적인 드리블을 방해하기도 했다.

선수들은 무릎이 까져 피를 흘리면서도 끝까지 볼을 쫓았고, 한쪽 팔이 짧은 선수도 상대의 돌파를 온몸으로 막아냈다. 경기장 옆에서는 맥주와 샌드위치를 팔았다. 수익금은 얼마 되지 않지만 전액 자선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다.

수퍼 선데이 풋볼리그는 3년 전, 인천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하는 미국인 대런 바버가 창설했다. 네 팀으로 시작한 리그는 '축구에 굶주린'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금세 몸집이 불어났다.

서울.인천.수원은 물론 청주에서도 팀이 만들어졌다. 내년에는 12~14개 팀이 리그를 펼칠 예정이다. 선수들의 직업은 영어 강사가 가장 많고, 외국인회사 직원.주한미군.공장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인터넷 홈페이지(http://groups.msn.com/thesupersundayfootballleague)로 소식을 주고받는다.

뉘엿뉘엿 땅거미가 깔리고, '팀 파이팅'이 8-2로 승리한 가운데 올스타전은 끝났다.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된 선수들은 따뜻하게 서로를 얼싸안았다. 이국 생활이 고단하겠지만 축구가 있어 이들은 행복해 보였다.

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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