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스타] 꽃미남은 가라! 남자가 되고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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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빈(26)은 문화상품이자 민간 외교사절이다.

드라마·CF에 비친 그의 부드러운 마스크는 이제 일본에서 인기가 더 높다. 지난 23일 고도(古都) 경주엔 일본 관광객 4백20여명이 몰려들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감독 강제규)의 촬영 현장에서 주연을 맡은 그를 직접 보려는 사람들이다.

장동건(31)까지 합류했다. 이들이 인삿말을 하자 일본인 관광객들이 “와”하고 함성을 지르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도 많다. 원빈의 얼굴을 새긴 티셔츠를 입은 40대 여성도 보인다.

문화는 진정 상품인 모양이다. 이들은 일반 한국관광 패키지 상품보다 세 배 가량 비싼 1백40만원을 기꺼이 지불했다. 경주 보문관광단지에서 산속 외길을 30여분 덜컹거리며 달려 지금은 폐쇄된 한 목장까지 찾아왔다.

◇ 남자가 되고 싶다

야트막한 야산에 차려진 촬영장에 탱크.군용트럭.기관총 등이 보인다. 의자가 없어 모두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거나, 서서 구경해야 했다. 그런데도 불평 한마디 없다. 오! 스타의 힘, 나아가 영화의 힘….

원빈은 긴장했다. 많은 이방인에 놀란 모양이다. 손톱을 만지작거리거나, 허공을 응시한다. 정면을 쳐다볼 용기가 안 나는 듯하다. 낯가림이 심한 것으로 유명한 그다.

"예전 같으면 이런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굵고 나직한 목소리에서 솔직함이 느껴졌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쉬리'의 강제규 감독이 1백30억원을 들여 만드는 영화다. 배경은 한국전쟁. 피냄새 진동하는 전장의 한복판으로 징집된 두 형제의 사랑과 갈등이 뼈대다. 장동건은 동생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가장(家長) 스타일의 형 진태를, 원빈은 그런 형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론 무모한 전투를 일삼는 형에게 반발하는 동생 진석을 맡았다.

"남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의 출연 동기는 간단했다. 그간 쌓아온 미소년, 이른바 꽃미남 이미지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강원도 정선 산골 태생의 그에게 덧씌워진 허상(虛像)의 파괴라고나 할까.

"그래도 그 때문에 오늘까지 왔잖아요."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 모습을? 장기적으로 봐야죠."

◇배우로 크고 싶다

사실 원빈을 보는 시선은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정상의 스타로 올라섰지만 연기자로서의 역량엔 아직 물음표가 따라다닌다. 드라마 '가을동화'로 탄력을 받은 그의 인기가 화면 넓은 스크린으로도 이어질 수 있을까. 게다가 이번 영화는 기획단계부터 할리우드 진입을 노리는 액션 대작이 아닌가.(감독은 '쉬리'를 수류탄에, '태극기 휘날리며'를 미사일에 비유했을 정도다.)

강감독도 "처음엔 불안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몰라보게 달라졌다. 몰입이 뛰어나고, 의견도 자주 낸다"며 "군복 입히고 일주일을 찍었더니 꽃미남 이미지도 자연스레 사라졌다"고 말했다.

원빈은 온통 구릿빛이다. 군복도 꽤나 남루하다. '킬러들의 수다'(2001년)에서 남성영화에 도전했으나 이렇게 긴장되기는 처음이란다.

"영화는 제가 맡은 진석의 시선으로 전개됩니다. 전쟁의 비참함을 목격하면서 내적으로 성숙해가는 캐릭터죠. 감정의 변화가 큽니다. 제가 실수하면 작품이 망가지기 십상이죠. 펑펑 우는 장면도 많고, 분노를 터뜨리는 장면도 적지 않아요. 세상을 전혀 모르는 순수한 청년이 삶을 알아가는 과정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배우로 커가는 고통이겠죠."

◇역사를 알고 싶다

밤 8시, 촬영 준비가 한창이다. 산 정상에 대형 조명 크레인이 설치되고, 만약을 대비해 소방차도 출동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수세에 몰린 국군이 전세를 돌리려고 기습전을 펼친다. 혁혁한 공을 세워 동생을 군대에서 빼내려는 진태와, 그런 형에 맞서는 진석의 대립이 본격화하는 장면이다.

촬영은 밤 11시가 넘어 시작됐다. 화염병을 들고 돌진하는 국군에게 인민군의 대응 사격이 이어졌다. 참호 곳곳에서 폭탄이 터졌다. 붉은 화염이 솟아 오르고,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일곱 시간 넘게 기다린 관광객 사이에서 박수와 환호가 계속됐다.

원빈은 과연 한국전쟁을 얼마나 이해할까.

"사실 40대에게도 6.25는 굉장히 오래된 전쟁으로 기억됩니다. 저 같은 신세대는 그 의미를 전혀 느끼지 못하죠. 촬영 전에 책.비디오를 통해 공부했지만 제가 안다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피상적 수준이겠죠. 하지만 영화의 중심은 인간입니다. 전쟁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깊이 있게 그려질 겁니다."

감독은 "눈물이 쏙 빠지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지난 25일 끝난 칸 영화제 견본시에서 일본.스칸디나비아 국가에 판권이 팔리는 등 사전 반응이 좋은 편이다. 한국영화의 한 획을 그은 '쉬리' 의 영광이 재현될 수 있을지…. 그건 이제 한 인간으로, 또 배우로 성장하려는 원빈의 미래와 직결될 것이다. 내년 1월 16일 개봉 예정이다.

경주=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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