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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부락서 송기떡으로 연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나는 1921년 경북안동군풍천면 광덕리 속칭 안심부락에서 아버지 노백봉씨와 어머니 막실댁사이의 2남2녀중 장녀로 태어났다. 내가 어머니의 성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옛날 농촌에서 흔히 부인네들은 이름석자대신 탁호를 썼기 때문이다.
원래 아버지의 고향은 경북예천군 호명면 한어동인데 이곳은 광산노씨의 집성촌으로 당시 노씨 문중만 모종 부어놓은듯 옹기종기 40여호가 모여살았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운 일족이 모여 산다해도 가난으로 피곤한 이웃들끼리 오순도순하기는어려웠던 것같다.
당시는 일제가 3·1운동이후 유화정책을 썼다고는 하지만 벽촌시골은 1년 내내 지은 농사를 추수때 곡물을 공출당하고 나면 생계가 위협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같은 어려움속에서도 아버지는 12세되던해 이웃 막실골의 곱다란 15세난 처녀에게 장가를 들었다.
아버지는 결혼했으나 나이가 어려 계속 할아버지댁에 살다 좀더 나이가 들자 남의 집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린 뼈마디가 채 굵어지기도전에 아내를 맞은 아버지는 뼈가 부서져라 일을 했으나 생활이 별로 나아지지는 못했다.
해가 가고 아버지 나이가 23세가 되던 해 살림을 나기로 했다.
살림을 난다고는 했으나 당시 어디가서 살든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실정이라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는 것이 문전걸식을 하더라도 마음이나 편하다는 생각으로 정든 고향을 등지기로 했었다.
그래서 젊은 부부가 가난을 피해 괴나리봇짐을 지고 고향을 떠나 정착한 곳이 바로 내가 태어난 광덕리 안심부락이었다. 이 마을이 안심부락으로 불린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이곳은 소나무숲이 울창해 송기가 많았고 들판에는 자생하는 칡이며 도라지·더덕·참비름등을 손쉽게 재취할수 있어 먹고 사는 것만은 안심할수 있다하여 안심부락이라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아버지고향 호명에서 불과 40릿길. 원래 안심부락은 안동 권씨들의 세거지였으나 큰아버님이 정착해 사셨기때문에 외로움이나마 덜고자 큰아버님을 찾아 무작정 고향을 등졌다고 한다.
하지만 큰아버지 역시 가족들과 입에 풀칠하기 조차 어려운 형편이었다.
안심부락은 원래 낙동강상류가 굽이져 흐르는 강변모래펄이어서 쌀농사는 물론 보리농사도 안되는 황무지였다.
그러나 끈질긴 주민들이 이 모래밭을 일궈 조·수수·감자·땅콩·고구마등을 심어 주식으로 삼을수 있었으나 모래밭마저 한줌 일굴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은 으례 날품을 팔아 끼니를 이을 도리밖에 없었다.
이러한 곳에 맨주먹으로 뛰어든 아버지는 우선 마을뒤 원지산아래 초막을 쳤다.
소나무와 짚더미로 얼기설기 얽어놓은 집은 어찌보면 기어들고 기어나오는 움막에 불과했으나 이곳은 부모님의 신혼의 보금자리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는 부모님이 안심부락에 정착하신지 1년도 채못돼 이 움막에서 태어난 것이다.
나는 이미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울무렵부터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곧잘 원지산언덕배기를 오르내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원지산 솔숲은 날이면 날마다 동네아낙네들로부터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송기채취행렬이 줄을 잇곤했다.
우리 모녀도 예외없이 소나무껍질을 벗겨 송기를 뜯어내는 것이 거의 판에 박은 일과였다.
그것은 우리가족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좀 유복한 집안에서는 송기로 떡을 해먹기도 했으나 우리네처럼 찌든 가난속에 사는 사람들은 으례 송기죽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일쑤였다.
그뿐아니라 봄·여름·가을철에는 들판에 나가 칡이며 도라지나 비름나물을 뜯어 양식을 장만하기도 했으니 내 어릴때 기억으로는 명절이 되어도 보리밥 한톨 구경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처럼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행복했던 순간이 가끔은 있었다. 낮은 뒷동산에 봄철이면 찾아오는 흐드러지게 피는 봄꽃과 마을앞에 있던 연못「한샘」가에서 놀며 어린시절을 보냈던 기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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