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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기업가족친화경영중] 1. 가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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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독일의 화학회사 바스프가 운영 중인 사내유치원 루키즈(Lukids)에서 보모가 3세 미만의 아기들을 돌보고 있다. 바스프 직원은 출근 때 아기를 루키즈에 맡겼다가 퇴근할 때 집으로 데려갈 수 있다. 루트비히스 하펜(독일)=신인섭 기자

선진 기업들이 저출산.고령화.가족 해체 시대의 벽을 넘기 위해 '일과 가정의 조화'를 새로운 경영 화두로 삼고 있다. 직원들이 회사 일과 가정 사이에 끼어 아까운 경력을 포기하거나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회사가 적극적으로 직원의 가정 문제를 배려하며 경쟁력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직원들의 사정에 따라 근무시간과 장소를 유연하게 해 주고 출산.육아뿐 아니라 노인 부모 돌보기까지 지원하고 있다.

◆ 근무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정=미국 소프트웨어 업체인 새스(SAS)에서 자원봉사 업무를 담당하는 제인 에이코크는 2000년 아들을 입양하고 근무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정했다. 그는 금요일 오후 일찍 퇴근하는 대신 평일에는 더 일찍 출근한다. 에이코크는 "원래 아이를 입양하며 파트타임 근무로 전환하려 했으나 회사에서 근무시간을 조정해 줘 아이를 입양하기 전과 똑같이 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 제약업체 브리스톨마이어스스킵(BMS)은 '탄력근무 옵션' 제도를 운영 중이다. 직원은 회사와 협의해 일정 기간 동안 파트타임으로 전환할 수 있다. 근무시간을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출퇴근 시간도 자신의 사정에 따라 일찍 출근해 일찍 퇴근하거나 늦게 출근해 늦게 퇴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은 전체 직원의 약 12%가 파트타임 근무 또는 휴직 중이다. 직원의 업무가 파트타임에 맞지 않는 경우 다른 부서로 옮길 수도 있다. 집에서 일하는 직원도 160명 정도 된다.

◆ 남자 직원을 변하게 한다=일본 도쿄의 중심가 긴자에 자리한 시세이도 본사. 생산부에서 일하는 마사노리 미야무라는 최근 부인의 출산에 맞춰 2주간의 출산휴가를 다녀왔다. 2일 이 회사에서 만난 마사노리는 "갓 태어난 아기와 부인에게 훌륭한 아빠와 남편 노릇을 한 것 같아 뿌듯하고 휴가 뒤 업무 능률도 더 오른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가 출산휴가를 '부담 없이' 가게 된 것은 회사에서 남자 직원의 출산휴가를 공개적으로 권고했기 때문이다. 히로노부 아사다 광고홍보부 차장은 "남자는 밖에 나가 일하고 육아와 가사는 여성이 전담하는 시대는 갔다"며 "사회에 진출한 여성이 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남자도 육아와 가사에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화학회사 카오는 1년간의 육아휴직을 이용한 남자 직원이 다섯 명이나 있다고 밝혔다. 새스의 경우 육아 혜택 수혜자의 4분의 1이 남자 직원이다. 독일 헤센주의 주립방송인 하에르 방송국에선 지난달에만 네 명의 남자 직원이 출산휴가를 신청했다.

◆ 복리후생이 아니라 투자=일본의 닛산자동차와 시세이도는 가족친화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각각 다양성 개발실과 사회책임부(CSR)라는 부서까지 두고 있다. 이들 회사에서 출산 여성의 95% 이상이 당당하게 육아휴직을 하고 100% 복직하는 것도 회사의 적극적인 정책 때문이다.

기업들은 이 같은 가족친화 정책이 투자라고 여기고 있다. 직원들의 가사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변화된 사회환경 속에 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선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닛산의 요시마루 유키코 다양성 개발실장은 "사원의 능력 이외의 걸림돌을 없애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시세이도의 사토시 히로타 국제홍보담당은 "현재의 제도는 사원의 경력 중단을 최소화해 업무 성과를 높이기 위해 꾸준히 개선해 온 결과"라고 말했다.

독일의 화학회사 바스프의 하르트무트 랑 전략기획실장은 "직원들의 가정이 불행해서는 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없다"며 "직원들을 지원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지만 이는 기업 경쟁력 제고로 이어져 장기적으로는 회사에도 이익"이라고 강조했다. 바이엘의 볼프강 셍크 기획조정실장은 "독일은 출산율 저하로 15~20년 뒤면 노동력 부족이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될 것"이라며 "가사를 여성과 남성이 분담할 수 있도록 기업들이 지원하지 않으면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지역사회도 발벗고 나서=독일 하에르 방송국은 육아 문제를 퇴직 사원과 지역사회가 함께 해결하고 있다. 하에르 방송국은 2001년 이후 퇴직자들이 직원들의 아이들을 돌봐 주는 키비즈(Kibiz)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방송국은 운영 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키비즈 프로그램을 지역 내 다른 기업이나 은행, 주정부 등에도 개방하고 이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았다.

방학 중에는 비어 있는 학교 교실을 이용해 여름방학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하에르 방송국의 페트라 세퍼-슈베르트 여성정책실장은 "출산율이 낮아 커뮤니티 전체가 어린이 교육에 발 벗고 나선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미국.독일.일본 = 이영렬(팀장),

이현상.장정훈.홍주연 기자(이상 산업부), 신인섭 기자(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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