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성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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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지난 한해를 되돌아 보며 못다한 일을 후회도 하고, 맞이하는 한해를 바라보며 새로운 생활을 그리며 다짐해 보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관례다.
나라살림도 개인의 경우와 마찬가지인 듯, 해마다 연초에 즈음하여 우리는 푸짐한 말의 잔치에 초대되곤 한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대민업무 보고를>
부처마다 한햇동안 운영의 기본틀을 국민과 관련부서에 대해 미리 알려줌으로써 즉흥적으로 행정하거나 표류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사태가 일어난 다음에야 임기응변으로 꾸려가지 않는 다는 것을 내보이는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업무계획보고는 하나의 관행으로 정착한 듯 하다. 여러해 동안 이것을 지켜 보아온 국민의 한 사람으로 필자나름대로 느낀 몇가지 소감과 아울러 좁은 소견을 적어볼까 한다.
우선 부처마다 업무계획을 세우는 일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인력이 투입되지나 않을까하는 느낌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특히 연말연초에 즈음하여 행정 및 관리업무와 대민간봉사업무에 비하여 계획업무가 비대함에 따라 일시적으로나마 일상적 업무운영에 차질이 빚어질 우려가 없지 않다. 관료의 능력평가가 실제 업무추진능력보다 때로는 오히려 브리핑기술로 판가름 되기도 한다는 세평이 유효할 수록 이 같은 경향은 더욱윽 가속화 될 것이다. 보고양식에도 문제가 있다. 흔히 개조식으로 쓰인 짧은 문장과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어휘들이 애용된다. 개조식문장 뒤에는 빈약한 사고능력과 문항간의 모순이 피신할 수 있으며, 애용되는 낱말들은 흔히 듣기에는 그럴싸 하지만 별로 내용을 담지 못하거나 뜻의 전달이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활성화」「확충」 「내실화」 등의 단어는 실제에 있어서 때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뜻인지 모호한 경우가 있다.
같은 사업을 매년 계획보고하기 곤란하다 하여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굴하려고 하기도, 실현가능성 여부를 미리 따져보는 노력이 부족한 경우도 있는 듯 하다. 중요한 계속추진사업이라면 수년간 업무계획에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관성 잃을 가능성>
흔히 부서장이 바뀌면 전임자가 마련했던 계획내용중 계속추진이 필요한 사업이라도 중단되거나 방향을 바꾸거나 덜 강조하고 새로운 사업을 즐겨 추구하는 나머지 자칫하면 행정의 일관성을 잃게 될 가능성이 있다. 한 때 농업통계에 무리를 빛었듯이 때로는 전임부서장보다 더울 의욕적인 계획을 현실을 무시하고 내세운 적도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부처별 업무계획을 보고하기 이전에 관련부처간의 절충이 층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도 있다. 사전에 부처별 업무계획을 조화있게 종합하고 조정하는 기능이 미비하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예산절약을 의식하지 못하는 의욕이 앞선 계획을 내세울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A부서의 업무계획보고가 끝나면 B부서에서는 중복과 상충을 피히기 위하여 단기간의 수정작업을 감행하기도 하는 듯 하다.
새해 계획을 세우는 일에 못지 않게 지난해 계획이 과연 어느정도 추진되었는지 알아보는 일도 중요하다. 현행업무계획에는 성과평가가 등한시되고 있으며 필자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업무추진 결과를 점검하는 행정기능이 취약한 느낌이다.
이상의 여러가지 이유로해서 업무계획보고가 자칫 잘못되면 정부의 부서장들이 공명심을 경쟁하는 행사로 전락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구체적 개선방안을 제시하는 일은 필자의 능력한계와 전문분야를 벗어나는 것이지만, 적어도 기본방향, 또는 과제에 관련하여 다음 몇가지 논급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연말연시에 행정능력이 계획업무에 집중되는 결과로 일반행정업무 운동이 단시간이나마 순조롭지 않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업무계획 보고행사의 비중을 현재보다 낮추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계획내용도 모든 사항이 망라되도록 나열할것이 아니라 중점사업만을 선정하여 기획함으로써 준비에 투입되는 시간과 인력을 감축하는 한편 보고 그 자체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 의견교환시간을 늘렸으면 하는 생각을 갖게된다.
다음으로 업무계획의 수립에 비하여 등한시 되어온 사업추진의 성과를 점검·평가하는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실현가능성이 의문시되는 계획을 깊은 책임의식 없이 열거하는 있음직한 폐단을 예방하는 과제가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홍보량은 알맞게>
브리핑능력이 츨세를 크게 좌우했다는 지난날의 세평에서 크게 탈피하여 타당성이 인정된 과업의 추진정도를 크게 고려하되 여기서 유의할 점은 비록 추진정도는 높다 하더라도 다른 측면에서 무리가 따르지 않았는가를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특히 지적하여야 할 사항은 그럴싸한 개획목표의 조기달성을 위하여 민심이 동요되거나 자극되는 일어 없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지만 매우 중요한 과제는 보도기관에 비추어진 업무계획 보고의 양식과 관련된다. 적어도 전자매체에 비추어진 것을 보면 업무보고 행사가 보다 다양하고 부드러웠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몇주일에 걸쳐 같은 시간대에 국민들에게 집중적으로 홍보되는 보도량이 너무나 많아 소화물량을 느끼게 될 우려가 있으므로 보도양식을 다양화하고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며 때로는 토론도 있는 가운데 국사가 마련된다는 것을 보여 주도록 노력하였으면 하는 바람을 느끼게 된다.
국민이 정부의 업무계획보고 행사에 관심을 갖게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따라서 이 같은 행사를 통해서 보도 되는 새로운 사업계획에도 관심을 쏟게 되지만 그 사업이 과연 연말에 이르러 어느정도나 실현되느냐에도 못지 않게 주의를 가지고 바라보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관계당국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싹트게 되기도 하고 불신의 벽을 높이 쌓기도 한다. 동시에 중요한 것은 업무계획의 구체적 내용 못지 않게 국민에게 투영되는 정부의 이미지도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필자=서강대 경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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