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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고향<100>예안(선성)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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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예안김씨의 시조는 고말충렬왕 연간 선성현으로 불린 예안의 호장을 지낸 상.
대부분의 김씨들이 신라 왕족에 그 근원을 두고있고 경주김씨의 족보에 『김상이 선성을 본관으로 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세계의 멸실로 무덤조차 찾을길 없고 8세 노로부터 계보가 밝혀진다.
양김의 인구는 2만명.
노는 안동댐공사로 수몰된 터방 예안으로부터 영주로 세거지를 옮겨온 장본인. 그에게는 4형제의 아들어 있있다. 려말조초의 풍운으로부터 집안을 보호키위해 둘째숙량은 공주로, 세째중량은 송도로 보내 흩어져 살게하니 지금의 호남·영남·북파가 이로부터 갈라지게된다.

<시조는 려말때 김상>
우왕때 현감을 지낸 노의 장남 소량은 3형제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승과 2남 담으로부터 예안김문이 빛을 보게된다.
담은 예김의 중시조로 받들어지고있는 인물. 일찌기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한 담은 집현전학사로 있으면서 특히 천문에 뛰어나 어린나이에 지금의 기상대와 과학기술처격인 간의대서 활약, 17세때인 세종15년 (1433)에는 세종의 영을 발아 이순지와함께 원의 접시력, 명의 대통력을 종합해 우리실정에 맞는 칠정산내편을 엮였다. 그는 또 이순지·이위·장영실등과 함께 간의규표, 앙부일철, 자격누등의 천문기구도 만들어 과학발전에 이바지했다. 담은 천문·지리·풍수등에 통달, 세종의 총에를 받았고 성삼문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었다.
계유정난으로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선왕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 중앙벼술을 버리고 안동부사, 충주목사등의 외직으로 나갔다.
그는 동도부사로 있을때 금각산에 있던 매월당 김시습과 자주 만나 동병상련의 정을 달래며 신라의 고적을 중수하는데 힘쓰기도 했다. 당시 세조가 이조판서의 벼술을 내리며 두번씩이나 불렀으나 사양, 승정원일기에는 「사판삼신이일」로 기록돼있다.
형 승 또한 성삼문·신숙주등과 더불어 어깨를 견줄만큼 학문이 높아 이들과 함께 홍무정운을 번역하고 역대병요를 편찬하기도했다.
숙량의 손자 수손도 세종2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대사성과 이조참판을 지내는등 예김을 빛낸다. 그러나 예김은 담의 세조부사로 일단 문세가 급강하, 이후 1백여년간 침묵을 지킨다. 여기서 의김의 중흥을 가져온 사람이 백암 김늑. 명종때 형조좌랑을 지낸 사문의 아들인 늑은 퇴계의 문인. 선조9년 26살로 오리 이원익, 학봉 김성일 등과 함께 문과에 급제, 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까지 올랐던 인물.
임난이 터지자 늑은 경상도 안집사로 백성들을 위무하는 한편 부체찰사로 진주로 충무공을 찾아가 대책을 상의하고 숨져간 병사들의 위령제를 지냈다. 충무공이 투옥됐을때는 서애와함께 구명운동을 벌이고 전쟁이 끝나자 대사헌으로 시무16조를 올려 민심수습에 앞장서기도했다. 임난이끝난3년후 왜의 재침기미가 있자 조정에서는 그서 명에 동지사로 보내 청병케했는데 신종황제가 「재역불가」의 5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하자 「반오조」를 들어 설득하니 신종이 가상히 여겨 벼루와 비단등을 하사하며 왜에 경계의 칙지를 내릴 것을 약속했다.
선종승하후 성균관대사성으로있던 백암은 광해군2년 당시 세도가 정인홍이 퇴계·이언적·김굉필·정여창·조광조등 이른바 오현의 문묘배향을 방해하자 직소하는가하면 광해가 생모김씨를위해 궐내에 봉자전을 세우려하자 이를 반대하다 사탈관직당하는 강직함을 보였다. 그후 영주로 낙향한 백암은 귀학정과 천운정이란 정자를 지어놓고 이수광·한석봉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했으니 지금도 남아있는 귀학정의현판은 석봉의 글씨다.
백암과 비슷한 시대의 인물인 수손의 증손 운송 해역시 상주목사로 임난을 맞아 둘째아들 경원과함께 싸우다 순절했다. 뒤이어 종도 전사, 이번에는 부인밀양박씨가 참변소식을 듣고 9일간 통곡끝에 굶어죽으니 한꺼번에 충신·효자·열녀·충복이 쏟아져나와 세상에서는 「사정」이라하여 4개의 정각을 세웠다.
예김은 벼슬보다는 절개와 두터운 학문을 중히 여겨왔는데 조선조에 문과급제자 32명을 배출한것 못지않게 유림의 대표인 소두가 6명이나 되는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김찬규, 감옥서 순국>
영조때 동부승지를 지낸 백암의 7세손 두암야련은 시부송책등 기존의 문형에서 벗어나 활달무방한 수필형식의 산문체 문장으로 두암집5권을 남겨 한양 선비들이 다투어 구해 읽었을 정도.
이밖에 학자로는 사간으로 송시열을 탄핵했던 노주 태일과 서장관부사로 연경을 두번씩 다녀오고 좌승지를 지낸 단계 해일형제와 단계의 아들 이만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이만은 문집6권을 남겼는데 76세로 죽자 성호이익이 묘비명을 써 그의 학문과 인격을 기렸을 정도.
이같은 예김의 문풍은 근대에도 계속되는데 대표적 인물이 정산 김동진.
그는 영주서 도강서당을 열고 문인 4백여명을 길러냈는데 경술국치후 당시 경남에있던 면우곽종석과 북경에있던 심산 김창숙등과 모의, 1919년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유림단1백8인서명에 종친인 동려 석진·사진과 함께 대표로 낀 인물.
또 구한말 비서원승을 지낸 석연 김찬규는 합방되자 가족을 이끌고 북간도로 건너가 독립군 군자금 조달과 국내연락등 활약을 벌이며 5번이나 투옥, 1929년 모금차 국내로 잠입타가 일경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서 순국했다.
이밖에도 고종 인산시 분에 못이겨 영주서 보름간 단식하다 숨진 김성진, 국내에서 신간회청년동맹과 농민조합을 결성했고 해방전까지 동경 만주등지서 지하투쟁을 벌이며 6년형을 살았던 김화진도 꼭 기억해야할 인물.
해방후에도 예김에서는 각분야에걸쳐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보전출신으로 일본경도 「송죽」의 주연급배우로 나운규와 함께 영화발전에 힘썼던 김천규와 「논개」 「양산도」에서 주연을 맡았던 50년대후반의 스타김삼화도 이집안 출신. 반민특위중앙수사부장을 지낸 김제선씨, 제3대경북도의원을 지낸 김창룡씨, 장군석발견으로 최연소 학술원상을 받은 김수광박사도 예김.
현재 학계에는 김화영 (고대불문과), 나란히 서울대문리대수학과 교수로있는 김제필·제완형제가 있고 법조계에는 김제선, 김유진씨가 변호사로, 김원제(서울고법) 김병재(청주지법) 김대휘(서울지법) 씨등이 판사로 활약중이다.
실업가로는 김학진(재일·행진개발회장), 김한도(선경고문)씨등이있다.
이밖에 삽화가 김경우, 서예가 김제식, MBC야구이사 김기주, 서양화가 김호걸씨등도 예김을 빛내고 있다.

<지명인사>종친회제공
▲김수진(서울대교수·지질학과) ▲김재필(서울대문리대수학과교수) ▲김제완(서울대문리대수학과교수) ▲김화영(고대불문과교수) ▲김윤진(주가·약박) ▲김제선(서울성보의원원장) ▲김영기(치박) ▲김영길(동아대교수·이박) ▲김제선(변호사) ▲김용진(변호사) ▲김원제(서울고법판사) ▲김병신(청주지법판사) ▲김대휘(서울지법판사) ▲김제균((주)동광산업사장) ▲김창룡(제3대경북도의원) ▲김제선(전반민특위중앙수사부장) ▲김창제(대한탁구협회이사) ▲김창제(정읍교육장) ▲김찬동(전상공부차관보) ▲김우영(건설부서기관) ▲김운한(예비준역) ▲김경우(삽화가) ▲김호열(서양화가) ▲김제식(서양화가) ▲김한도(선경고문) ▲김기주(MBC야구이사) ▲김학진(재일실업가·행진개발회장)▲김진남((주)범양공업회장) ▲김제덕((주)풍전염료사장) ▲김동수(신진건설사장) ▲김제학(부산일성목재사장) ▲김재진(울진주유소사장) ▲김휘길((주)경북기계공업사장) ▲김재룡((주)한국협회화학사장) ▲김제영(아세아중석회장) ▲김석환(진우금속사장) ▲김동한((주)고려인삼이사) ▲김숙진(삼애산업부사장) ▲김환(일본나고야한인학교교장) ▲김제관(전대구지방전매청장) ▲김호(한학자) ▲김수영(한학자) ▲김용현(종친회장) ▲김홍원(한학자) <글 이만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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