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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국가배상 소송 항소심 패소…한 푼도 못 받아

중앙일보

입력

1970년대 유신시절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83)이 국가로부터 손해 배상을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됐다.
서울고법 민사33부(부장 이경춘)은 백 선생과 백 선생의 부인 김정숙(82)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심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결했다고 8일 밝혔다.

지난해 1심에선 “국가가 총 2억1600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항소심에서 결과가 뒤집힌 것은 지난달 대법원 판례에 따른 것이다. 당시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은 “긴급조치 1호가 사후적으로 법원에서 위헌ㆍ무효로 선언되었다 하더라도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대통령의 이런 권력행사가 국민 개개인에 대한 관계에서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없다”며 “유신시절 긴급조치에 따른 수사에 대해 국가와 공무원이 배상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 같은 대법원 판례를 들어 “백기완에 대한 수사와 유죄판결은 긴급조치 1호에 따라 이뤄진 행위로서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제시했다. 이어 “이번 소송이 백기완이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1975년 2월로부터 5년이 훨씬 경과한 2013년 9월 제기됐으므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 시효도 소멸됐다”고 말했다.

백 소장은 1974년 1월께 개헌청원 서명운동본부 발기인으로 유산반대 운동을 벌이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긴급조치 1호 최초 위반자로 기소돼 징역 12년 선고됐다. 2013년 8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국가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했다. 지난해 1심은 “국가기관이 헌법상 의무를 저버리고 오히려 가해자가 돼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장기간 구금 생활로 그(백 소장)와 부인이 겪었을 정신적 고통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앞서 올해 초 새정치민주연합 설훈 의원도 “1970년대 시국사건에 연루돼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항소심에서 패소했다. 지난 1월 서울고법 민사12부(부장 김기정)는 설 의원과 그의 가족이 지난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당초 “1억400만원을 배상하라”고 했던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긴급조치가 70년대 당시엔 적법한 효력을 가진 법이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한 수사나 재판 자체를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는 첫 판결이었다.

이 판결 이후 긴급조치 ‘국가배상 0원 판결’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김한길(62) 새정치련 전 공동대표가 부친인 고(故) 김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대표)의 억울한 옥고에 대해 배상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의 항소심을 앞두고 있다. 이재오(70) 새누리당 의원도 긴급조치로 옥고를 치른 것을 배상하라며 낸 소송의 상고심이 예정돼 있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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