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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알아야 나라가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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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일러스트=박용석]
사공일
본사 고문·전 재무부 장관

최근 들어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과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에 대한 국론이 분분하다. 이러한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은 얼마 전 “강대국 사이에 끼어 ‘큰일 났네’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주변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우리 스스로의 이익보다 그들의 반응을 먼저 걱정해 우왕좌왕할 필요 없다는 맞는 말이다. 다만 이 말은 강대국 간의 이해상충으로 빚어진 외교적 도전을 유연한 전략적 사고에 따른 능동적 외교로 잘 극복할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활용할 줄 아는 지혜가 전제되어야 한다.

 주변이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우리는 태생적으로 그들을 잘 알고 바깥세상 변화에 미리 대응할 줄 아는 남다른 지혜와 외교역량이 필요한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급기야 나라마저 잃게 되었던 쓰라린 역사적 고행뿐 아니라 최근(1990년대 말)에 겪었던 환란(換亂)도 따지고 보면 우리 정책당국과 기업들이 급변해온 세계경제 여건 변화를 미리 내다보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 초래된 변고 아니었던가.

 과연 현재 우리는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지혜롭게 대처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뒤늦게나마 가입하기로 한 AIIB와 관련해 한번 생각해보자.

 중국의 AIIB 창설 이니셔티브는 단순히 아시아 지역 차원의 인프라 은행을 하나 만들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세계 경제대국으로 재부상한 중국이 미국 중심의 기존 세계경제 체제 내지 세계경제 질서를 자기중심으로 바꾸려는 원대한 장기 구상의 일환으로 위안화의 국제 기축통화화 노력 등과 함께 추진하는 전략적 차원에서 봐야 한다.

 이러한 중국의 강한 전략적 의지와 함께 가용한 재원과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와 명분도 갖고 있다. 아시아 지역은 물론이려니와 세계 전반에 걸친 방대한 인프라 투자 수요에 태부족인 재원조달에 중국이 기여하겠다는 명분이 있다. 이에 더해 기존의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 체제에서는 구매력평가 기준으로 이미 세계 제1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위상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면 현재 미국의 IMF 쿼터는 17.69%인 반면 중국 쿼터는 4%에 불과하다. 그나마 일부 쿼터 조정안도 현재 미국 의회 비준 거부로 묶여 있다. 한마디로 AIIB는 상당한 국제적 호응 속에서 출범할 수 있는 유리한 배경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처음부터 우리의 대응은 달랐어야 했다. 참여뿐 아니라 창설 과정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어야 했다(본지 2014년 9월 1일자 본 칼럼). 그 역할이란 우리와 생각이 비슷한 나라들이 AIIB에 함께 들어가 이 기구가 투명하고 공정하게 운영되며 기존 국제기구와의 보완적 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가입 이전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우방이며 주요 경제 파트너인 미국의 이해를 촉구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미국도 이에 적극 참여해야 함을 설득했어야 했다. 미국이 반대하든 지지하든 AIIB는 만들어진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미국은 우리와 호주 등 AIIB 내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들의 가입을 권장하도록 설득했어야 했다. 그리고 중국에 AIIB가 단순히 지역 차원의 배타적 기구가 아닌 개방된 국제기구가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미국의 참여와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한 운영방식이 중요함을 설득하는 데에도 앞장섰어야 했다.

 이러한 우리의 외교적 노력이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어도 될 이유가 있다. 중국은 중국 주도의 세계경제질서 창출이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동시에 미국과 중국은 이미 무역과 투자, 금융 등 경제적 측면에서 상당히 깊은 통합 단계에 와 있어 상호 의존성이 아주 높다. 따라서 양국은 모든 분야에서 상호 큰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게 될 극단적 충돌은 가능한 한 피하고 절충하게 되어 있다. AIIB도 궁극적으로 중국과 미국 간의 타협점을 찾아 운영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적극적인 역할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새로운 세계질서, 중국 중심의 ‘뉴노멀 세계질서(new normal world order)’를 향해 아시아 지역에서부터 전략적 노력을 앞으로 꾸준히 펼쳐나갈 것이다. 반면에 미국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재균형(rebalancing)을 위한 노력을 더욱 강화해나갈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AIIB와 같은 중국의 새로운 이니셔티브와 미국의 대응이 우리에겐 외교적 도전으로 자주 대두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틈새에서 우리는 핀란디제이션(finlandization)의 비애를 넘어 도전을 기회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와 적극적 외교역량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사공일 본사 고문·전 재무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