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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과 펜과 색연필로 즐거운 삶을 그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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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호 09면

서울 인사동에서 민화 화실을 운영하는 조은희 강사가 그린 ‘계도(鷄圖)’. 조씨는 “처음 선을 치는 것부터 연습해 두 세달 정도면 자기 작품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부담없이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린다는 건 인간의 본능 아닐까. 돌 전후만 돼도 아이들은 낙서를 시작한다. 글을 깨치기에 앞서, 말문이 트이기도 전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는 표현 수단이 바로 그리기인 것이다.

민화·펜화·컬러링에 빠진 사람들

지난해부터 불어닥친 컬러링 열풍은 이 오래된 본능을 자극한 하나의 사례다. 가장 단순하고 즉각적인 방식의 색칠은 전문적으로 기교를 배우지 않아도, 거창한 준비 없이도 가능하다는 점이 무기다.

찾아 보면 컬러링 말고도 비슷한 강점을 지닌 그리기 취미들은 더 있다. 민화와 펜화다. 둘 다 정규 미술 교육과정에서는 접하기 힘든 장르다. 하지만 ‘진입 장벽 낮은’ 그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일반인들 사이에서 예술적 표현은 물론 힐링의 수단으로 뿌리내리고 있다. 한번쯤 도전해 볼만 한 그림 그리기 취미, S매거진이 그 세계를 엿봤다.

김미경 작가의 펜화 ‘서촌 옥상도6’. 김씨는 사진을 보고 그리는 대신 실제 동네 옥상 여기저기 오르내리며 한옥과 양옥이 어우러진 서촌의 풍경을 그려낸다.

본 따라 그리는 민화는 접근하기 쉬워 인기
올 봄 민화(民畵)는 다시 만인의 그림으로 등극할 모양새다. 좀처럼 뉴스가 없는 민화계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3권으로 구성된 화집 『한국의 채색화』(다할미디어)와 가회민화박물관의 도록『민화본색』(지디비주얼)이 잇따라 출간된 것. <관계기사 20~21면> 한국은 물론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민화와 궁중화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전집들이다. 여기에 국내 최대 규모인 강진 한국민화뮤지엄까지 다음달 개관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가을 서울옥션에서 작자 미상의 ‘민화경작도’가 경매가 1억 원을 넘겼다. 한국민화학회 정병모(56) 회장은 이를 “시장의 수요와 맞닿아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조선시대 사대부가 주도권을 잡기 이전에는 채색화가 회화의 중심이었다”며 “우리 고유의 특색이 잘 드러나는 민화가 재조명되고 있는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왕실에서 새해 벽두 대문에 그림을 붙여 귀신을 쫓는 세화(歲畵)에서 유래해 민간으로 확대된 루트도 재현되고 있다. 일일문화강좌 사이트 ‘클래스원데이’를 운영하고 있는 연다영(28) 대표는 “지난해 드라마 ‘마마’에서 송윤아씨가 민화 작가로 나오면서 올드한 장르가 아닌 세련된 이미지란 인식이 생겨난 것 같다”며 “같은 동양화라도 산수화보다 소망을 담은 문자도나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도 수업이 인기가 많다”고 밝혔다. 화목할 화(和)ㆍ기쁠 희(喜) 등의 글자에 바람을 담는 것도 좋은 일이 있을 징조를 담는 길상(吉祥)화와 상통하는 맥락이다.

30일 서울 인사동 안단테 민화 화실에서 만난 이동임(61)씨는 10폭짜리 병풍을 만들기 위해 8번째 폭에 능수능란하게 붉은 모란을 그리고 있었다. 그에게 민화를 택한 이유를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섬세하지 못해서.”

이 대답에 대해 조은희(58) 강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민화는 본을 따라 그리면서 시작하기 때문에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진입 장벽이 낮습니다. 서양 중심의 사고를 중시하던 흐름이 한풀 꺾인 것도 민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데 일조한 것 같아요.”

예술창작소 ‘평범한 사람들’에서 민화를 가르치는 이은정(28)씨는 “신혼집에 놓을 장식이나 생일 선물 등을 만들기 위해 찾는 분들도 많다”며 “힐링에 대한 관심, 내 손으로 직접 만드는 DIY 열풍과도 맞아떨어진다”고 전한다. 올해 신설된 국립민속박물관의 ‘수요일에 만나는 우리 민화’ 프로그램이 조기 마감되고 가회민화박물관에서 토요문화학교 ‘민화에 풍덩’에 문의가 쇄도하는 현실은 이 같은 인기를 방증한다.

안충기 작가가 그린 펜화 ‘불국사’. 멀리서 보면 흑백 사진 같지만 가까이 보면 수많은 가는 선이 생동감 있게 겹쳐져 있다.

작품 하나에 100시간 … 그래도 끌리는 펜화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는 7일까지 특별한 전시가 열린다. 한국펜화가협회가 다섯 번째로 마련한 정기전이다. ‘협회’라는 이름이 거창하게 들리지만 기실 단체는 펜화를 그리는 동호회다. 5년 전 김영택 화백이 진행한 펜화 수업에 참여한 수강생들이 뭉쳤다. 전문 작가나 강사 등 몇몇을 제외하곤 20여 명의 회원들은 취미로 펜을 붙들고 있다. 신문기자·은행원·건축사 등 직업도 다양하다. 전시에 나온 60여점의 작품 역시 문화재·성당·판잣집 등 소재가 제각각이다.

이들이 펜화에 빠져든 사연은 ‘어느 날 갑자기’다. 공기관 직원 김애선(56)씨는 4년 전 한 갤러리에서 펜화 전시를 보게 됐다. 단순하고 세밀한 선으로만 그린 그림에 왠지 호감이 갔다. 흑백으로만 표현되는 그림이 단조로우면서도 평화롭게까지 느껴졌다. “실력이나 재능보다 공들인 것에 대한 가치가 느껴졌달까, 그런 그림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게다가 책상과 종이, 펜만 있으면 언제든 그릴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화실에 가거나 도구를 갖춰야 시작할 수 있는 다른 그림보다 부담이 적었다는 얘기다.

신문기자 안충기(51)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2008년 8월 중순 집에 왔는데, 참 사는 게 재미가 없더라고요. 소싯적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를 좀 들었으니까, 즉흥적으로 아이 스케치북을 꺼내 가는 펜으로 다보탑을 그리기 시작했죠. 그런데 7시간쯤이 훌쩍 흘러갔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경험이죠.” 이후 그는 경동교회·길상사 등 문화유산을 펜화로 그리기 시작했다.

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완벽한 공감이 가지 않았다. 3040㎝ 크기를 그리려면 보통 100시간 가량을 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구부린 자세로 단순 반복을 해야하는 중노동이다. 그럼에도 끌리는 이유가 뭘까. 그들의 답은 ‘간증’처럼 들렸다.

“등산하고 비슷해요. 1~2시간만 지나고 몸이 풀리면 10~11시간도 끄덕없이 그리죠. 스케치한 형상이 하나하나씩 살아날 때, 이게 그림이 될까 싶었던 회의가 사라지면서 성취감이 대단하죠. 펜끝의 오르가즘이라고나 할까.”(안) “음악 연주 같아요. 한 번 음을 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어요. 그냥 가는 거죠. 덧칠할 수 있는 수채화나 유화랑 달라요. 선만으로 승부하죠. 그러니 몰두할 수 밖에 없고요. 아, 경험해 보지 않고는 몰라요.”(김)

취미가 직업이 되기도 한다. 뉴욕 한국문화원에서 근무하다 귀국한 김미경(55)씨는 취미 그림교실에서 만화과 교수인 강사를 만났다. 선만으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고나니 색칠하기가 오히려 아깝다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펜화와 겹쳐졌단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서촌의 풍경을 펜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화가로 사는 건 1억년 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말하던 그였지만 1년 전부터 본격 화가의 길로 접어들어 개인전을 열었고, 40여 점이 ‘완판’되는 행운도 따랐다. 그는 “천천히 나만의 방식대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뜻밖의 결과가 생겼다”며 웃었다. “왜 그런 말 있죠. 우리가 누에고치라면 그 실을 뽑아내기만 하면 되는데 결국 못 뽑고 가는 것이라고. 누구나 자기만의 선이 있다고 생각해요.”

『비밀의 정원』으로 컬리링북 열풍을 일으킨 작가 조해너 배스포드의 신작 『신비의 숲』에 수록된 이미지. 숲의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한층 신비롭고 다채로운 동물과 벌레 등을 만날 수 있다. 전작보다 난이도를 낮춘 것도 특징. 직접 색연필을 들고 나만의 그림을 완성해 보자.
컬러링북에 스토리텔링을 더한『시간의 정원』속 이미지. 도시ㆍ음식ㆍ패션 등 컬러링북 종류도 한층 다양해지고 있다.

식을 줄 모르는 컬러링북 열기
지난해 8월 출간 이후 색칠공부 열풍을 일으켰던 컬러링북 『비밀의 정원』(클)의 인기는 아직도 식을 줄 모른다. 22개 언어로 출간돼 전세계에서 판매된 140만 부 중 약 30%(43만 부)가 한국에서 팔려나갔다. 지난달 신작 『신비의 숲』(클)을 펴낸 영국 작가 조해너 배스포드는 “인터넷과 디지털기기로 둘러싸인 삶 속에서 아날로그와 크리에이티브한 활동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것 같다”며 안티 스트레스북의 인기 요인을 꼽았다.

교보문고는 지난해 9월 발 빠르게 컬러링북이라는 소분류를 신설했다. 이달까지 출간된 책만 무려 168종에 달한다. 꽃과 숲 등 전통적인 패턴을 다룬 『보타니컬 아트 컬러링북』(아이콘북스)부터 도시 풍경을 담은 『파리 시크릿』(자음과 모음), 스토리를 내세운 『시간의 정원』(북라이프)등 다양한 소재로 분화하고 있다. 서점마다 컬러링북 코너를 따로 만들어 색연필ㆍ사인펜 등과 함께 판매하고 있다.

CJ제일제당, 현대백화점 등은 지난달 레시피와 우편 광고물을 컬러링북 형태로 만들어 배포했다. 회사원 최다혜(27)씨는 “색연필을 잡으면 잡생각이 사라져 마음이 편안해진다”며 “엄마도 처음엔 어린애들처럼 뭘 이런 걸 샀냐고 하시더니 어느새 같이 하고 계시더라”고 말했다.

서점이나 북카페에서 삼삼오오 모여 함께하는 모임도 늘고 있다. 컬러링북과 명상을 접목한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예술치유강사 박유미(35)씨는 “나무 같은 원형 자체가 생명력이 있고 스트레스 이완 효과가 있다”며 “조금 익숙해지면 도안을 벗어나 스스로 그림을 그리길 권유한다”고 말했다. 창의성이 발현되면서 자존감 역시 향상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 “처음 시작하는 색을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며 “너무 흥분돼 있는 상태라면 파랑이나 녹색, 좀 가라앉아있다 싶으면 붉은 계열을 활용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팁을 전했다.

그렇다면 유독 한국인들이 색칠하기에 더욱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김선현 차의과대 미술치료대학원 교수는 “기존에는 음주나 여행 등 사람간의 관계에서 소비적인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했다면 최근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푸는 경향이 강해졌다”며 “그림에 대한 문턱이 낮아지면서 미술관에 가거나 작가들만 할 수 있는 창작활동이 아닌 일반인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영역이 됐다”고 분석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 역시 촉매제가 됐다. 사진처럼 그림도 바로 찍어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배스포드 작가 역시 농담삼아 “180만 팔로어를 가진 한국의 인기 스타 김기범(샤이니의 키)가 인스타그램에 직접 색칠한 그림을 올려준 것도 인기몰이에 한 몫 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글 이도은·민경원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한국펜화가협회·클·북라이프·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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