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카페] '무인천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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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천하/구종서 지음, 중앙 M&B/전 5권, 각권 8천5백원

부패는 극에 달하고 사회 병폐를 청산할 만한 시스템은 탄력을 잃은 채 정정이 어지럽기만 하던 고려 중기, 혁명 장교들에 의해 거사된 드라마틱한 무인정변은 오랫동안 역사소설이 다뤄온 단골 소재였다.

신선하지 않은 이야깃감에 도전해 성공하는 길은 당연히 '어떻게 같은 소재를 다룬 기존 소설들과 차별화하느냐' 하는 변별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대한일보.중앙일보 등에 20년간 몸담으며 월남 특파원 등을 지낸 언론인 출신의 구종서(65)씨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균형잡힌 태도를 역사소설에 접근하는 출발점으로 삼았다.

"사료에 나와있지 않은 부분을 꾸밀 때는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 작품을 흡인력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하겠지만 소설적 재미를 위해 기록에 엄연히 나와 있는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훼손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역사 있는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일종의 자계(自戒)다. 그리고 그런 출발점은 왜곡과 첨삭에 과감해 오히려 역사인식을 교란시키는 TV 사극이나 소설들과의 거리두기다.

구씨는 언론을 떠난 뒤 삼성경제연구소 정치담당 연구위원, 남북적십자회담 한국 측 대표 등을 지내며 경험의 외연을 넓혔다. 다양한 체험이 구씨의 균형감각에 든든한 바탕이 되었을 법하다.

신간 5권은 고려 18대 임금인 의종시대 정중부의 난으로부터 최충헌이 권력을 안정시키기까지 30년간을 다뤘다.

거사를 일으킨 무신들에 의한 보현사에서의 무자비한 문신 학살장면, 무인정변이 성공한 뒤 정변 주체 세력 내의 권력 다툼, 최충헌이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아우 최충수를 처형하는 과정, '만적의 난' 등 최충헌에 반대한 세력들의 도전 등 격동의 30년이 기자적인 관찰력, 탄탄한 글쓰기에 힘입어 구체적인 실감을 획득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4백20여개의 각주를 달아 낯선 역사적인 용어들을 설명했고 내용과 관계된 지도, 해당 시기의 연표 등을 친절하게 따라 붙였다.

신간 5권은 저자가 집필을 끝낸 12권짜리 역사소설 '백년대란'의 1부에 불과하다. 2부 '항몽전쟁' 다섯권은 칭기즈칸이 등장해 세계 제국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고려가 경험한 몽고의 침공과 대항, 3부 '삼별초' 두권은 24대 원종이 몽고와 화친하자 이에 불복한 삼별초의 저항을 각각 담았다.

언론인.정치 전문가에서 소설가로 전업한 변신의 변이 궁금했다. 구씨는 "학교 다닐 때 문학청년 아니었던 사람 누가 있나. 은퇴하고 처음에는 시를 써볼까 하다가 신문기자라는 전력에는 아무래도 소설이 낫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의견을 받아들여 소설을 시작했는데 1998년 운좋게도 고향 강화도의 역사를 다룬 소설 '나문재'가 자유문학 신인상을 받게 돼 문단에 데뷔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때 사학자를 꿈꿨을 만큼 역사에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역사소설을 쓰게 됐고, 소설 형식을 통해 역사 지식을 쉽게 전달해보자고 생각했다"고 한다.

구씨는 "초라한 패배로 끝나는 삼별초의 얘기로 '백년대란'을 끝내는 게 마음에 걸려 공민왕 때 원나라 세력을 내쫓고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는 내용을 담은 세권을 더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부지런함과 소신으로 창작에 몰두하는 구씨의 뒷모습이 믿음직스럽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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