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규호의 시대공감] 단호하되 절제된 대응 필요한 대일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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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부의 신뢰외교는 순항하고 있는가. 그간 국내 여론조사는 외교·안보정책이 다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여 왔다. 지난 26일 정부는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창립회원국으로 참여키로 결정하였다. 한국의 AIIB 참여는 그간 미국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정부 나름대로 신중하게 검토한 후, 주도적으로 결정한 것 같다. 다만 영국·독일·프랑스 등 서방 선진국의 참여를 지켜본 후 나온 결정이어서 수동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3월에는 해외에서도 ‘국익 추구’라는 외교의 기본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하는 일 두 건이 있었다. 첫째, 영국은 지난 12일 서방 선진국으로서는 처음으로 AIIB 참여를 공식 발표하였다. 미국의 반대가 있었던 사안인 만큼, 영국의 독자적인 결정은 주목받았다. 영국의 이러한 실리 위주의 결정은 평소 대미 관계에서 특별히 높은 수준의 신뢰를 유지해 온 외교 자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리콴유(李光耀) 싱가포르 초대총리의 사거(死去)다. 싱가포르 건국 이래 민족 갈등 등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오늘의 번영을 이끈 거인에 대해 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은 영웅적인 실용주의자였다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 중 지난 24일자 로져 코헨의 뉴욕타임스(NYT) 기사가 눈길을 잡는다. 코헨은 리콴유의 덕목을 청렴이라고 꼽은 후, 대외관계에서는 과거사의 포로가 되지 않고 역사를 교훈으로 하여 미래를 지향(forward-looking)한 지도자였다고 높이 평가한다.

현재 한국의 대외관계 중 양국관계 차원에서는 수교 50주년을 맞은 한·일관계의 경색이 두드러진다. 기본적으로 일본 정치의 주류가 역사수정주의적인 움직임을 심화시킨 데서 온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동북아에서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는 때문인지, 최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게 4월 방미 시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는 기회를 주었다. 일본 총리로는 처음이다.

지난 23일엔 한·일 양국의 전 총리 등 원로급 지도자 10여 명이 아베 총리와 만나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결단을 촉구한 바 있다. 동북아에서 전략적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는 양국의 관계가 방치할 수 없는 정도로 악화되었다는 인식의 결과다. 26일 도쿄 한국문화원 방화사건은 우발적인 일회성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재발 방지가 필요하다. 국민간 감정이 고조돼 있어 상대방에 대한 방화나 테러 등 위해는 자칫 양국관계를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는 지역 협력 차원에서는 가장 뒤처진 지역 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 가운데에 일본의 과거사 문제가 자리 잡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과의 갈등을 관리함에 있어서 한국이 국익의 관점에서 전략적으로 재점검해 보아야 할 것은 없는 것일까.

우선, 일본 측의 과거사 관련 도발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절제된 대응’의 전략적 효과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혹자는 위안부 문제 등으로 국민감정이 격앙돼 있는 마당에 유약한 대응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강한 대응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점을 여러 외교적 경험은 가르쳐 주고 있다.

부모가 아이들을 교육할 때 강하게 나무란다고 반드시 교육 효과가 보장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80년대 초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섬 도발을 무력 응징한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외교 사안을 다룰 때 자주 쓰던 표현 중 하나가 ‘단호하되 절제된 대응(firm and measured response)’이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한국이 갈등관리를 넘어 좀 더 능동적으로 지역협력의 분위기를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지난 21일 3년 만에 서울에서 개최된 한·중·일 3국 외교장관 회담은 3국 협력의 동력을 유지시킨다는 의미가 컸다. 한국은 동북아 3국의 3각 관계에서 가장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한·일관계에서도 청소년·대학생 등 각계 각층의 인적교류를 획기적으로 심화하는 등 관계 발전의 기반을 공고히 해야 할 여지가 많다. 우리 정부가 신뢰외교의 한 축인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의 실천을 위해 냉철히 국익을 추구하는 실용적인 외교자세를 더욱 가다듬기를 기대한다.

추규호 한국외교협회부회장(전 주영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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