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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지식 콘퍼런스' TED의 인기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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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시작 전부터 1000명 넘는 인원이 행사장에 서로 먼저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는 ‘콘퍼런스(학회)’가 있다. 연단 바로 앞자리에 앉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한다. 강연이 끝나자마자 감동에 젖은 청중은 ‘기립 박수’를 친다. 바로 ‘TED 콘퍼런스’가 그 주인공이다. TED는 ‘기술(Technology),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디자인(Design)’의 약자로 지식형 콘서트를 표방한다. 기술이나 정치·철학 같은 사회과학을 주제로 한 콘퍼런스들은 보통 따분하게 마련이지만 TED는 남다르다. 단순한 기술 박람회도 아니고 ‘문·사·철’을 다루는 ‘지식 콘서트’에만 국한돼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TED의 인기 비결은 매년 콘퍼런스마다 감칠맛 나는 ‘쇼 비즈니스’의 요소를 더한다는 점에 있다. 2000년 건축가인 리처드 워먼으로부터 1400만 달러(약 155억원)를 주고 TED를 인수한 크리스 앤더슨이 그 같은 변화와 도전을 주도하는 사령탑이다. TED는 강연에 나서는 연사부터 독특하다. 교수와 학자 대신 꼭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 인물들이 바로 눈앞에 등장한다.

 이달 중순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2015년 TED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인물도 그랬다. 1990년대 중·후반 세계를 뜨겁게 달궜던 모니카 르윈스키였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에 언론의 집중 공세를 받았던 르윈스키는 올해 TED 콘퍼런스에서 ‘사회 운동가’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보다 더 온정적인 인터넷’을 만들자고 청중 앞에서 제안했고 환호를 받았다. 앞서 지난해 TED에선 미국의 불법 도청 등을 폭로해 파란을 일으켰던 전 중앙정보부(CI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을 ‘깜짝 등장’시켜 화제를 모았다. 스노든이 던진 ‘검열 없는 인터넷 세상’이란 화두 역시 각국의 네티즌들에게 깊이 각인됐다. 이런 ‘화제 인물’들의 등장은 TED의 쇼비즈니스적 요소에서 비롯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실제 르윈스키나 스노든뿐 아니라 등장하는 연사들을 보면 눈길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래리 페이지 구글 최고경영자(CEO) 같은 미국 정보기술(IT) 산업을 이끌어가는 ‘스타 경영인’은 기본이다. 케빈 러드 전 호주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등 세계 정상급 지도자와 영화 ‘아바타’를 제작한 감독 제임스 캐머런과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까지 영역을 가리지 않는다. 세계적 명사들은 TED에서 ‘위대한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도 한다. 빌 게이츠는 올해 TED에서 ‘에볼라 방역 홍보관’을 자비로 제작했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에볼라 방역 복장을 입어보고, 실제 검역 활동을 체험하게 했다.

 기업들은 이렇게 인기 만점인 TED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더 다가서려 한다. TED는 구글·도요타·몰스킨 등 글로벌 기업 29개의 후원을 받고 있다. TED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4500만 달러) 가운데 참가료는 2700만 달러였고 나머지는 후원금이었다. 기업들은 TED를 지원하는 대신 자신들의 미래 전략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릴 기회를 얻는다.

 올해 구글에선 ‘자율 주행차(무인차)’ 프로젝트 총책임자인 크리스 엄슨이 연사로 나섰다. 엄슨은 보행자·주변차량뿐 아니라 도로 위를 무단횡단하는 강아지까지 모두 파악할 수 있는 ‘3D(3차원)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화면을 전격 공개해 주목받았다. 그는 “구글은 지금까지 70만 마일(약 112만㎞) 이상 시범주행을 했다”며 “교통사고와 차량 혼잡을 줄이고 우리가 사는 도시에 변화를 주기 위해 무인차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계의 지식인들에게 무인차 안전성을 알리는 ‘창(窓)’으로 TED를 선택한 셈이다.

 이번 TED 현장에선 구글 못지않게 관심을 끈 후원 기업이 있었다. 일본 도요타였다. 수많은 차를 제쳐놓고 전기차 ‘아이로드’를 행사장에 전시해 주목받았다. 언제 어디서나 ‘자전거처럼 빌릴 수 있는 차’를 지향하는 도요타의 전기차 전략을 TED에서 선보인 것이다. 도요타는 TED가 열린 캐나다 밴쿠버의 컨벤션센터 지하에 ‘특설 시승장’을 만들어 더 많은 사람이 아이로드를 타볼 수 있게 했다. 또 가상현실기기 제작업체 ‘오큘러스 VR’도 콘퍼런스 현장에서 무료로 체험 기회를 줬다.

 TED의 매력은 밤에도 이어진다. 콘퍼런스 기간에 밤새 파티가 열려 오전 2시가 다 되도록 불을 피워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즉흥적으로 손에 잡히는 악기를 들고 연주를 하며 흥을 돋운다. 노래하는 밴드들은 방금 전까지 이야기도 나눠본 적 없는 사이다. 또 강연자들 역시 직접 저녁 시간을 내서 방청객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TED의 총연출자 크리스 앤더슨은 자신을 ‘큐레이터’라고 부른다. 그가 제시한 TED의 구호는 ‘Ideas Worth Spreading(확산할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이었다. TED가 성공한 건 ‘개방적’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앤더슨은 2006년 강연을 인터넷에 무료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직접 참가하는 사람들이 4400달러를 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담한’ 시도였다. 그러나 무료 공개 이후 TED의 인기는 더 높아졌다. 지금도 매일 200만 명이 TED 홈페이지에서 1600개의 강연을 본다. 누적 시청 인원은 10억 명을 넘는다. 그게 TED의 힘이다.

사진 설명

TED는 18분간의 강연뿐 아니라 음악·춤·파티 등 각종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더하고 있다. TED에서 ‘에볼라’를 주제로 강연한 빌 게이츠(사진 7)와 매년 참석하는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사진 1). [김영민 기자], [사진 TED]

[S BOX] 르윈스키에게 박수 친 고어

앨 고어(67) 전 미국 부통령은 2006년 TED에서 연사로 등장한 이후 매년 TED 콘퍼런스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골 손님’이다. 지구 온난화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불편한 진실’을 제작한 계기로 TED 연단에 섰던 고어는 이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정치인에서 환경운동가로 자리매김했다. TED 2015에서도 고어 전 부통령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잘생기고 젊은 미국 부통령은 어느덧 60대 노신사로 변해 있었다. 하버드대 출신의 말끔한 이미지는 사라졌고, 비만형 체형에 염색은 하지 않은 듯 백발이 성성했다. 또 1990년대 부통령 재임 당시 약점으로 지적받았던 느끼한 말투 대신 자신의 고향 테네시주가 속한 미국 남부 특유의 빠른 말투를 사용했다.

 올해 TED에서 고어는 빌 클린턴(69) 전 대통령과 스캔들을 일으킨 모니카 르윈스키의 강연에도 참석했다. 사실 그에게 르윈스키는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존재다. 2000년 조지 W 부시(69) 전 대통령과의 대통령 선거에서 석패한 데엔 ‘르윈스키 스캔들’도 한몫한 탓이다. 심지어 대선 이후 고어는 클린턴과 2년간 말도 섞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고어는 르윈스키의 18분 강연이 끝나고 참석자들이 기립 박수로 화답했을 때 함께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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