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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업체들 ‘꽃보다 할매’ 작전 패션 광고에 노인 모델 대거 투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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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호 06면

프랑스 럭셔리 패션 브랜드 생로랑 광고에 등장한 싱어송라이터 조니 미첼. 70년대를 풍미했던 그는 올해로 72세. 그런가 하면 셀린느는 80세의 작가 조앤 디디언을 모델로 내세웠다. [사진 각 브랜드]

‘이번 시즌 패션계의 가장 핫한 트렌드는 패션쇼 무대가 아니라 패션 잡지 광고 페이지에서부터 나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더 나이 들고, 더 현명하고, 더 부유한’이란 제목의 최근 기사에서 언급한 ‘가장 핫한 트렌드’란 바로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할머니 모델 기용이다. 실제로 여러 패션업체가 올 들어 동시다발적으로 할머니 모델을 내세웠다. 셀린느는 젊은 시절 패션지 보그 에디터로 활동했던 80세의 유명 작가 조앤 디디언의 주름진 얼굴을 큼지막하게 클로즈업했고, 생로랑은 1970년대와 똑같이 긴 생머리에 통기타를 맨 72세의 싱어송라이터 조니 미첼의 흑백사진을 내보냈다. 그런가 하면 핸드백 브랜드 케이트 스페이드는 트루먼에서부터 케네디, 레이건을 거쳐 클린턴에 이르기까지 9명의 미국 대통령을 위해 백악관 인테리어 작업을 했던 94세의 전설적인 스타일 아이콘 아이리스 아펠을 모델로 등장시켰다.

그동안 비현실적으로 젊고 아름다운 모델에만 집착해온 패션업계의 관행에 비춰 볼 때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변화는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일부에서는 할머니 모델의 등장을 실버 마케팅으로 풀이한다. 노년층의 구매력, 다시 말해 불황 탓에 지갑이 얇아진 젊은 층을 공략하는 대신 여유 있는 실버 세대의 지갑을 열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FT 역시 ‘대부분의 부(富)를 쥐고 있는 50~60대 여성 실버 소비자가 럭셔리 소비재 시장에서 점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며 할머니 모델의 등장을 구매력과 연관 지어 해석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패션·뷰티 업계가 타깃 연령대보다 최소 10~20년 젊은 여성 모델을 내세워 온 데다 루이뷔통이 이미 2009년에 당시 79세였던 007의 영국 영화배우 숀 코너리를 모델로 내세웠다는 걸 감안하면 뭔가 부족한 설명이다. 할아버지 모델이 아니라 할머니 모델이 등장하게 된 배경엔 단지 구매력을 넘어서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많은 마케팅·트렌드 전문가들은 노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달라졌다는 데 주목한다.

최순화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는 “할머니 모델을 내세우는 광고는 노인에 대한 이미지가 과거와 달라졌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전에는 노인, 특히 할머니라고 하면 무조건 젊은 층이 보살펴 줘야만 하는 수동적인 약자 집단이라는 시선으로만 바라봤다”며 “하지만 구매력을 무기로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젊은’ 할머니가 늘면서 돌봄의 대상에서 동경의 대상으로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고 덧붙였다.

트렌드 분석회사 인터패션플래닝의 김효정 과장도 “나이 듦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은 생물학적 나이가 20세인지 60세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설령 80세가 넘더라도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갖고 있다면 스타일 아이콘이 될 수 있는 시대”라며 “럭셔리 브랜드가 이런 점을 발 빠르게 포착한 것”이라고 했다.

럭셔리 브랜드 광고가 단순한 상품 정보 대신 대중이 선망하는 이미지를 담아 동경심을 자극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광고에 등장하는 할머니 모델은 그와 동시대 노인층보다는 젊은 층을 공략하기 위한 선택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최 교수는 “할머니 모델을 내세운 럭셔리 브랜드들은 젊은 소비자들에게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이미지를 파는 것”이라며 “모델로 등장하는 인물이 평범한 할머니가 아니라는 것만 봐도 이를 잘 알 수 있다”고 했다.

가령 아이리스 아펠(작은 사진)은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 필름이 나올 정도로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자 2013년 가디언이 선정한 베스트 드레서 50인에 이름을 올릴 만큼 스타일로도 인정받는 인물이다. 화장품업체 맥(MAC)이 2012년 그의 이름을 딴 아이리스 아펠 컬렉션을 내놓을 만큼 미국 패션·디자인·뷰티 업계에서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한마디로 커리어와 스타일을 모두 잡았다는 면에서 젊은 여성들의 롤모델로 손색없기에 나이 90이 넘어 패션업체 광고모델로 등장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물론 돌체앤가바나처럼 지극히 평범한 할머니를 단체로 등장시킨 광고도 있지만, 이 광고에선 젊은 남녀 모델이 같이 등장하기 때문에 성격이 조금 다르다.

안혜리 기자 ahn.hai-r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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