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영웅 시리즈 <43>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구(IMF) 총재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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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첫 여성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된 크리스틴 라가르드. 대화와 소통을 통한 해결 방식을 제안하며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1945년 설립된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로 창립 70주년을 맞는다. 글로벌 통화협력을 통해 성장과 안정을 도모하는 IMF는 7557억 달러의 기금을 바탕으로 금융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원하며 여러 특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엄청난 돈을 만지는 세계 금융의 수장이 크리스틴 라가르드(59) IMF 총재다.

프랑스 파리 출신인 라가르드는 1956년 영어 교수인 아버지 로베르 라유에트와 라틴어 교사인 어머니 니콜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가톨릭 학교에 다녔으며 싱크로나이즈드 선수로 활동, 15세 때 전국대회 동메달을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16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어머니와 세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네 자녀를 홀로 키운 어머니로부터 강인한 정신력을 물려받았다는 평가다.

1974년 대입시험인 바칼로레아를 마친 그는 장학금을 받고 미국 메릴랜드주 베데스타에 있는 홀틈암스 학교를 1년간 다닐 기회를 얻었다. 그동안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공화당 소속 윌리엄 코언 당시 하원의원의 보좌관 인턴으로 일했다. 당시 신출내기 초선의원이던 코언은 하원의원(1973~79)을 거쳐 빌 클린턴 대통령 정권에서 국방장관(1997~2001)까지 지낸 거물 정치인이다.

인턴을 하면서 정치인과 국제적인 인물이 되는 꿈을 키운 라가르드는 프랑스로 돌아가 파리 10대학에 진학했다. 프랑스에선 그랑제콜이라고 불리는 엘리트 학교를 제외한 모든 대학이 사실상 지역 배정제를 택하고 있다. 집에서 가까운 지역의 대학에 다니게 하는 제도다. 파리 10대학은 소르본 대학이 확대된 13개 파리 대학 중 하나다.

대학을 마친 라가르드는 영어와 노동법에서 각각 하나씩 두 개의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사회법 고등디플로마(석사를 마친 뒤 1년간 더 공부해 받는 프랑스 특유의 학위)를 받고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엑상프로방스 정치연구소에서도 석사를 하나 더 받았다.

국립행정학교 낙방 후 변호사의 길로

이후 라가르드는 국립행정학교(ENA)에 응시했다가 낙방하는 시련을 겪게 된다. ENA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엘리트 학교로 졸업하면 정관계와 기업체 등에서 출세가 보장된다. ENA 진학과 공직자의 꿈을 포기한 라가르드는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실망하지 않고 새로운 분야에 새롭게 도전한 것이다.

파리에서 변호사를 하다 25세였던 1981년 미국 시카고에 본사를 둔 국제법률회사인 베이커 앤 맥킨지에 들어갔다. 맥킨지는 전 세계 35개국에 4600명의 변호사를 고용하고 있는 법률 서비스 업체다. 반독점법·노동법을 주로 다룬 그는 6년 만에 파트너(고위직 변호사)가 돼 서유럽 책임자인 파리 사무소장을 맡았다.

1999년에는 이 회사의 첫 여성 이사회 의장이 됐다. 1995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미국-유럽 관계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으로부터 레종되뇌르 기사장을 받았다.

글로벌 기업에서 승승장구하던 라가르드는 시라크로부터 정계 입문을 제의 받고 2005년 미국을 떠나 귀국했다. ENA 입학시험에 낙방했던 그가 국민을 대표해 ENA 출신이 지배하는 프랑스 관료사회를 통제할 정치인이 돼 돌아온 것이다. 금의환향이었다.

대중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라가르드는 2005년 6월 도미니크 드빌팽 총리 내각에서 대외통상 장관을 맡았다. 그는 입각 이틀 뒤 "프랑스가 대외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노동법부터 손봐야 한다”며 개혁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했다. 프랑스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준 그는 명성까지 함께 얻게 됐다.

그후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정권이 들어서자 프랑수아 피용 총리 내각에서 잠시 농업수산부 장관으로 일하다 ‘경제·재정 및 고용 장관’ 자리를 맡았다. 프랑스 경제 수장이자 G8국가 중에서 첫 여성 재무장관이 된 것이다. 2011년에는 드디어 IMF의 수장이 되었다. 총재로서 예리하지만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해왔다는 평이다. 원칙을 강요하기보다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는 편이다.

라가르드는 가정이나 개인적인 삶보다 일에 무게를 두는 스타일이다. 따라서 개인생활은 단조로운 편이다. 포도주를 즐기는 프랑스에서 드물게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으며 채식주의자다. 피트니스 센터에 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수영을 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다. 일을 하며 두 아들을 키운 ‘엄마 글로벌 금융인’이기도 하다.

그리스 사태와 라가르드식 협상

라가르드는 최근 그리스 문제 해결을 위해 주도적으로 뛰고 있다. 재정위기를 겪은 대표적인 나라인 그리스는 채권단인 유럽연합(EU)·국제통화기금(IMF)·유럽중앙은행(ECB) 등 이른바 트로이카(Troika)로부터 2010년 이후 2400억 유로(약 292조원)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라가르드가 5년의 IMF 총재 임기를 시작한 2011년 7월 5일은 그리스가 사태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2009년 말 시작됐던 유럽 재정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였다. 라가르드는 처음부터 유럽 재정위기를 구원할 특급 소방수로서 긴급 투입된 셈이다. 그는 여성으로서 첫 IMF 총재가 됐지만 이를 축하할 겨를도 없을 정도로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당시 그리스에 대한 트로이카의 분위기는 강경했다. EU와 ECB의 실세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그리스의 방만한 국가 운영 때문에 재정위기를 맞았으니 고강도 긴축으로 한 푼이라도 아끼면서 부채의 늪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웠다.

그리스 정부는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공공부문의 고용이 위축됐으며 복지와 연금 혜택도 축소됐다. 이전에 대책 없이 복지와 연금 혜택을 마구 늘린 데 따른 업보였다. 갓 IMF 총재가 된 라가르드는 처음에는 메르켈의 의견을 따랐다. 사태는 이 방향으로 해결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지난 1월 25일 치러진 총선에서 트로이카에 저항하는 급진좌파연합 정당 시리자에 표를 몰아준 것이다. 시리자는 트로이카와 재협상을 해서 부채를 대대적으로 탕감 받고 이를 바탕으로 긴축을 끝내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시리자 소속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긴축 조건을 완화하고 구제금융 가운데 일부를 탕감해달라고 요구하며 트로이카를 압박하고 있다.

처음엔 그리스가 유로존(유로화를 공동통화로 쓰는 유럽 19개국)을 떠날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으나 “그리스가 디폴트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며 유로존에서 이탈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며 “구제금융 재협상이나 부채 탕감에 대한 논의는 필요하다”고 말을 바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르켈은 최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기를 원하지만 부채에 대한 의무와 긴축 약속 등은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리스가 요구하는 부채탕감 요구에는 단호한 입장이다. 그리스와 트로이카, 특히 메르켈 간의 대치가 오래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라가르드는 메르켈과 다른 대응을 보였다. 라가르드는 지난 1월 27일 “IMF는 그리스를 계속 지원할 것이며 조기총선 결과에 따라 새롭게 구성된 정부와 대화하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했다. 라가르드식의 대화와 소통을 통한 순조로운 해결 방식을 제안한 것이다.

사실 그리스 경제는 죽음을 앞둔 불치병 환자 신세다. 실업률은 26%로 1929년 미국 대공황 때와 비슷하다. 국가 부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176%에 이른다. 이 중 80%는 유로존 채권국과 IMF, ECB 등 트로이카가 보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라가르드는 메르켈과 협력하면서도 대화를 통한 대안을 내놓아야 할 처지다. 출신 국가인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약속을 했다면 그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그리스에 채무 이행을 요구하면서도 일부 재협상과 긴축완화에는 원칙적으로 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라가르드의 고민이 그리스에서 끝날 것 같지가 않다는 점이다. 스페인을 비롯해 자신이 IMF 총재에 취임할 당시 재정위기로 속을 썩이던 나라들이 그리스처럼 재협상과 부채탕감 긴축조건 완화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 지른 불은 즉각 스페인으로 옮겨붙었다. 이렇게 되면 스페인도 그리스처럼 IMF를 비롯한 트로이카와 한바탕 격전을 치를 수밖에 없다. 라가르드의 고민이 커지는 이유지만 그의 능력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지원 자유기고가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라가르드가 걸어온 길

1956년 1월 1일 프랑스 파리에서 영어 교수인 아버지 로베르 라유에트와 라틴어 교사인 어머니 니콜 라유에트 사이에서 태어남.
1974년 미국 메릴랜드주 베데스타의 홀틈암스 학교를 다니면서 공화당 소속 윌리엄 코언 하원의원 보좌관 인턴으로 일함.
1981년 미국 국제법률회사인 베이커 앤 맥킨지에 들어감. 6년 만에 파트너 변호사가 됨. 서유럽 책임자인 파리 사무소장을 맡음.
1991년 시카고 본사로 옮김
1995년 이사회에 합류
1999년 이 회사의 첫 여성 이사회 의장이 됨
2002년 유럽판 월스트리트저널에서 ‘유럽에서 가장 힘 있는 여성’ 5위에 오름.
2004년 글로벌 전략 담당을 맡음.
1995~2002년 미국의 유명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미국-유럽 관계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2000년 레종되뇌르 기사장을 받음.
2005년 시라크 대통령의 정계 입문 제의 받고 귀국.
2005년 6월 도미니크 드빌팽 총리 내각에서 대외통상 장관을 맡음. 그는 입각 이틀 뒤 프랑스가 대외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노동법부터 손봐야 한다며 개혁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
2007년 프랑수아 피용 총리 내각에서 잠시 농업수산부 장관으로 일함.
2007~2011년 경제·재정 및 고용 장관 역임.
2011년 IMF 총재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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