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대표 2시간 붙든 이병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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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7일 박근혜 대통령과의 회동 후 새누리당 김무성·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2시간을 더 청와대에 머물렀다. ‘100분’(정확히 103분)의 회동 시간보다 더 길었다.

 여야 대표를 본회담보다 더 오래 ‘붙잡아두는’ 역할을 한 사람이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박 대통령이 회담 장소인 청와대 본관 접견실을 나가자 이 실장은 “대표님들과 얘기를 하고 싶다”며 자리를 만들었다. 발표할 내용을 서로 조율하자는 취지였다.

 2013년 9월 박 대통령과 황우여·김한길 당시 민주당 대표 간의 국회 사랑재 회담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 김기춘 비서실장도 국회에 왔으나 회동 후 양당 대표와 함께 발표 내용을 조율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는 18일 “그동안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회동한 뒤 각자 브리핑을 하면서 서로 유리한 내용만 담거나 자기 주장만 내세워 오히려 혼선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이 실장이 조율사로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회담에 참석한 새정치연합 관계자도 “이 실장이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전면에 나서지 않고 ‘그냥 청와대를 나가기보다 발표문이라도 내는 게 좋지 않겠느냐’면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만들어 가더라”고 전했다. 결국 이 실장이 분위기를 잡아 나가면서 3자회동이 끝난 뒤 공동발표문이란 형식의 정리된 내용이 나오게 됐다는 평가다. 이 실장은 박 대통령이 먼저 회담장에 가서 문 대표를 맞도록 하는 아이디어도 냈다. 박 대통령이 문 대표가 ‘손님’인 만큼 예우를 갖추는 그림을 만든 것이다.

 ‘3자회동’에서 이 실장이 ‘조율사’ 역할이었다면 ‘숨은 디자이너’가 조윤선 청와대 정무수석과 김현미 새정치연합 대표비서실장이었다. 회동 사전 협의를 맡았던 두 사람은 의제와 시간 등을 놓고 줄다리기가 치열했다. 당초 조 수석은 회동을 40분 정도로 하자고 했고 김 실장은 “최소한 1시간30분은 해야 한다”고 맞섰다.

 회동 뒤 발표문을 조율할 때도 조 수석과 김 실장 간엔 신경전이 이어졌다. 예컨대 연말정산 문제와 관련해 발표문에 포함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소득 5500만원 이하 근로자들이 손해 보지 않도록 준비하겠다”였다. 하지만 조율 과정에선 김 실장이 “5500만원이 아닌 ‘7000만원 이하 근로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도 하셨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벌어졌다. 새누리당 한 관계자는 “문안 조율 과정에서 조 수석과 김 실장의 주장이 맞서는 장면이 많았다”고 말했다. 회동 후 청와대와 야당 주변에선 박 대통령과 문 대표의 대표적인 여성 참모 두 사람 간에 새로운 라이벌 구도가 형성될지 모른다는 말도 나왔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공동 발표문의 글자수는 모두 723자였다. 조율에 2시간이 걸렸으니 1자를 담는 데 9.96초가 걸린 셈이다. 조 수석과 김 실장, 박대출(새누리당)·김영록(새정치연합) 대변인이 발언을 추리고 문구를 조율한 뒤 양당 대표로부터 확인 받느라 시간이 필요했다.

신용호·서승욱 기자 nov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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