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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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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정보실패, 정치실패, 인생실패도 있지만 판결실패도 있다.

판결실패는 죄와 벌의 문제다. 죄가 없는데 벌을 주는 경우다. 죄가 적은데 벌을 많이 주는 경우도 그렇다.

판결실패가 자주 있으면 국가 권력의 존재 이유에 의문이 생긴다. 말보다는 힘, 약속보다는 억지가 지배하는 무정부 상태가 될 수 있다.

가끔 법관의 미숙한 인격, 판단착오 같은 것들이 실패를 부른다. 잘 교육받고 법으로 독립성이 보장된 법 전문가들인데도 판결에 정치성이 숨어 있을 때가 있다. 상식적으로 밟아야 할 절차를 외면해 억울한 죽음을 낳기도 한다.

전문가들의 판결 실패를 줄이기 위해 외국에선 배심원이나 참심원제를 운영한다. 판결에 시민이 참여하는 제도다. 법관들이 빠질 수 있는 폐쇄성이나 집단사고에 시민적 감시를 둔다는 뜻이다. 신의 영역을 사람이 침범하는 사형선고 같은 중대 결정엔 시민의 소박하고 상식적인 판단이 들어가야 한다는 정신이기도 하다.

한국도 10여 년 논의를 거쳐 중한 형사사건에 한해 그때마다 선정된 시민들이 판결에 참여하는 사법참여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지금 사법개혁추진위(공동위원장 이해찬.한승헌)의 기획추진단이 관련 법안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15일 있을 공청회에선 재판에 참여하는 국민의 명칭이 쟁점이 될 것 같다. '사법 참여인''시민 재판원''시민 판사''시민 법관' 등이 거론된다.

그런데 참여인이나 재판원은 우리말에 없는 일본식 조어법이어서 어색하다. 시민판사 같은 용어는 누구에게나 쉽게 통하는 단순 명쾌함이 장점이다. 게다가 판사와 동등한 권한을 갖는 어감이어서 시민판사들은 자부심과 적극성을 갖게 될 것이다.

반면 오랫동안 권위와 명예, 정의의 상징이었던 판사들은 독보적인 명칭을 시민판사와 나눠 써야 한다는 상실감을 느낄 수 있다. 시민판사란 말엔 개방성, 상식, 참여의 밝은 맛이 있는가 하면 군중심리, 무책임, 완장 같은 부작용이 염려스러운 구석도 있다.

기왕 재판에 국민의 참여를 허용키로 했다면 참여하는 시민들이 판사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자기 의견을 주장할 수 있는 이름을 지어 주는 데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