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연극의틀」을 과감하게 깨뜨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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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문예회관 대극장로비에 들어서면 상복을 입은 광대들이 분을 잔뜩 바르고 끼리끼리 몰려앉아 장기를 두는가하면 윷도놀며 시시덕거리다가 아는 구경꾼이라도 들어오면 이를 하얗게 내놓고 웃는다. 개막시간도 안되었는데 이게 무슨 짓거리냐는 생각이 들어 구경꾼들은 초입서부터 당황한다. 구경꾼들이 모이기도 전에 연극은 시작된 것이다. 구경꾼들은 광대들의 짓거리부터 보다가 시간 맞춰 객석을 찾아 물어가면 광대들은 그제서야 뒤따라 들어온다. 캄캄한 객석에 북소리가 들려오면 뒤에서 누군가가 극형당한다. 불이 켜지면 무대는 발인한 상가처럼 텅비어 있다.
박윤초가 그 청랑한 창으로 자리걷이굿(해원)을 한다. 죽은 님을 그리는 애석한 창이다.
그리고 권세가의 횡포가 시작된다. 당초 왜 죽고 죽여야 되었는가가 실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시끌시끌하고 희극적이다. 인생은 광대짓이고 비극을 희극적으로 표현하겠다는 김정옥의 계산에 따른것이다. 발탈놀이가 시작되고 윤복희가 각설이가 되어 객석에서 동전을 구걸하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엿장수가 꽁짜엿을 준다. 그뿐이 아니다. 옛날 방귀시합이야기와 박정자·김금지가 팬터마임으로 엮는『욕의 미학』은 관객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전파해 준다.
각종 유행가들이 불려지는 속에 주인공이 극형되지만 그는 광대로 변신할 뿐이다.
이상과같이 플로트가 없다시피 한 연극을 보고있노라면 죽음의 신을 찬양하는 시골축제에서 놀이꾼들이 행렬을 지어 소란스런 야유와 익살을 퍼붓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고전희극의 원초형태를 연상케 된다. 그런데 그것이 완전히 한국의 민속재와 사생관으로 바꾸어져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번 작품에서는 희곡과 연출이 안보이고 배우만 보인다는 점에서부터 기존 연극의 틀을 근본적으로 뒤엎는다. 그만큼 즉흥적이고 우러나오는대로 엮어나갔다는 점에서 분방하고 생명력이넘친다.
사실 예술은 비논리적인 면이 강하다. 특히 우리의 고전예술이 더욱 그렇다. 영화를 전공한 김정옥은 그것을 간파했다. 그래서 민속을 몽타주한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적 심성구조를 이미지로 처리한 것이다.
따라서 전통과 현대가 이상스럽게 모자이크되면서 산만함과 이완감을 주기도한다. 그러면서도 분명한것은 두렵고 불가지한 죽음이 아주 친근하게 느껴져 온다는 사실이다. 김정옥은 바로 그것을 노린것이다. 그는 불교와 무속이 혼합된 죽음관을 갖고 있다. 삶과죽음이 하나의 시공속에 있다고 본점에서 그렇다. 사실 매우 추상적인 죽음의 문제를 연극적으로 접근한다는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국연극이 그동안 꺼려왔던 형이상적인 문제에 자유극장이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안하다. 다만 압권이라 할 끝 장면에서 가면행렬에 연극성을 부여하고 가면들도 전통에 바탕을 두고 제작되었더라면….<단국대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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