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주의 「이성의 세기」로 전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금으로부터 꼭 2백년전인 l784년 이승훈은 천주교영세를 받았다. 또 1백년전인 1884년 김옥균등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한국근대사에서 일어난 이두개의 중요한 사건을 놓고 한국민족주의를 새롭게 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홍구교수 (서울대·정치학)는 지난 2백년에 걸친 힌국민족주의 전개과정을 설명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예견하는 시각의 틀로서, 1784년 이승훈의 영세를 시발로 한 1백년을 「종교적 세기」로, 1884년 갑신정변으로부터 1백년을 「이데올로기의 세기」로, 그리고 1984년부터 앞으로의 1백년을「이성의 세기」로 성격짓고 있다.
이교수가 이승훈의 영세를 개인의 단순한 신상문제로 다루지 않고 한국민족주의 전개의,특히 「종교적 세기」의 시발점이라는 역사적 시점으로 다루려는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사건이 상당기간 축적된 서학에 대한 조선사회의 지식이 낳은 결과며 따라서 조선의 지적·문화적 풍토가 서학을「자의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일어났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승훈의 영세가 있던 시점은 바로 조선사회의 중요한 일부가 민족이 처한 정통성과 주체성의 위기를 함께 감지했던때다. 왜난·호난등으로 국가의 능력에 대한 신뢰는 크게 흔들렸고, 국민적 자존심도 깊은 상처를 입은 가운데 국민생활의 근거가 위협당했다.
당시의 영세는 한국사람이 종교적 소질이 풍부해서가 아니라 그 처지가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하는 처지에 빠져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교수는 정통성과 주체성의 위기의식과 더불어 유발된 이 민족의식은 교조적 집착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다분히 종교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위정척사운동과 동학운동 역시 외래적인 것에 대한 위기의식과 전통적인 것에 대한 교조적 믿음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 선종교적성격을 나누어 갖고 있다고 보았다.
한편 한국민족주의의 「종교적세기」로부터 「이데올로기적세기」로의 전환은 한마디로 「국민의식의정치화」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1884년 갑신정변의 기본성격은 무엇보다도 종교적 교조성으로부터 조선사회를 해방시키고 정치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부국강병을 꾀하려는 것이었다.
민중의 참여가 가장 중요한 권력자원이라는 의식이 깊어지고 민족주의는 민중의 동원을 선동하는 처방으로 활용됐다.
계교수는 종교로부터 이데올로기로의 변화과정을 가장 극적으로 나타낸 경우를 동학에서 찾았다. 종교적 세기에 파급된 포교적 조직은 일단 이데올로기의 세기로 접어들자 반침략·반봉건의 키치를 내세운 정치적 조긱으로 둔갑할 수 있었다(1894년의 동학혁명) .
1884년에 시작된 한국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세기는 1910년 국권상실과 더불어 독립운동이란 새무대에서 그성격을 성숙시킬 수 밖에 없었다.
특히 3·1운동 전후는 민족의식의 이데올로기화란 차원에선 급격한 진전인 동시에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분열의 시발점이었다.
1945년이래 국토분단이란 엄청난 시련속에서 한국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세기는 근대적 통일국가를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민족분열의 장기화로 막을 내리는 비극적 전개과정이였다. <이근성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