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신조어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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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아무래도 쌍권총찬 ET신세 면하기가 어려울것같애. 지난번 학기말시험을 조졌거든.』
지난10일하오 서울신촌로터리 OB베어생맥주집. 남자셋, 여자하나의 대학생들이 맥주잔을 앞에 놓고있다.『나도 전공은 모두 크리스찬 디올이야. 도배를 잔뜩 해두었는데 그 양수기가 어찌나 쫀쫀하게 구는지 브리핑도 못받았쟎아』청바지에 스웨터차림 여학생의 대꾸.
『너나 나나 IBM인데 신경쓸거 없쟎아. 굶는과 나와서 출세하것냐』
장발에 안경을 낀 남학생의 참견.
『그래도 우리과엔 3대명장이 계시쟎니. 그 보다도 올겨울을 양말없이 보낸게 너무 억울해.』
여학생이 맥주잔을 훌쩍 비운다.
옆에서 누가 듣건말건 거침없이 쏟아지는 은어와 신조어행진. 통역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한「말가운데 또다른 말」이 일상어의 접속으로 이어진다.「쌍권총찼다」는「F학점을 2개 맞았다」,「ET」는「이번학기 탈락자」,「크리스찬디올」은 C·D학점.
「도배」는 시험전 커닝을위해 책상이나 벽에 써두는 것을 뜻하며「양수기」는 침튀기며 강의하는 교수다.「존쫀하게」는「엄격하게」,「브리핑」은 시험중에 옆자리의 친구에게 해답을 불러주는 행위.
IBM은「이왕 버린몸」의 영어이니셜,「굶는과」는「국문과」유음변형,「3대명장」은 「강의못하는 3대교수」,「양말없다」는「애인없다」는 뜻이란다.
서광렬군(21·Y대경영과2년) 은『친구들과의 대화에서는 되도록 해학과 신선감넘치는 신조어와 기발한 은어를 개발해내고 쓰려는 경향이 크다』고 해설에 덧붙인다.
특수한 직업집단이나 조직에서 자신들의 이익·비밀을 보호하고 동류의식을 강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쓰여지는 은어. 그러나 오늘 우리사회에선 특수한 직업집단·조직만이 아닌 범사회적인 현상으로 은어사용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젊은 대학사회가 은어창조·유행의 큰 본산이다.
『얘,오늘 재미 있었니』모처럼 친정나들이를 한 정은숙씨(32·주부·서울서교동154) 는 K대영어교육과1학년인 여동생에게 물었다.『똥밟았어. 천재같은 애를 만났쟎아』
몇몇 친구들끼리 그룹미팅을 끝내고 돌아온 여동생은 얼굴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언니두 참, 그걸 몰우.「천하고 재수없는」형편없는 상대를 만났단 말야』정씨는 여동생의 대꾸에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고했다. 이정선씨(51·주부·서울화곡동248) 는 2남1녀의 어머니.
이씨는 D대식품영양학과 2년인 막내딸 윤경애양(21)에게 남자들로부터 자주전화가 걸려와 『너는 웬 남자친구가 그렇게 많으냐』고 했다가 오히려 핀잔을 들었다.『아까 그애는 가리지날 (가끔 만나는상대)이예요. 난 레퍼터리는 다양해도 (이성친구는 많아도)히트곡 (가장 좋아하는 사람) 은 하나뿐이니까 걱정마세요』
딸의 당돌한 대답에 이씨는 할말을 잃어버렸다. 이씨는『어찌보면 자유분방하고 발랄해 보이기도 하지만 괴상망측한 말들을 아무거리낌 없이 내뱉는것은 아무래도 대학생답지 않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S대 철학과4년 박근철군(23) 은『친구들과 어울리다보면 자연히 은어를 한두마디씩 배우게되고 재미있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쓰게 되지만 젊은이들의 은어속에는 비인간적이며 냉소적인 요소가많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예는「카」(이성파트너) 라는 말. 본래 카드놀이의 패를 의미하는 이말은 인간을 카드로 표현하는 인간경시풍조와 함께「옥떨메죠마킹카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를 죠스가 물어뜯고 마징가Z가 걷어차고 다시 킹콩이 짓밟은 파트너) 에 이르러서는 단순한유머를 넘어선 잔혹성마저 엿보인다.
장상준씨(45·회사원·서울방배동171) 는 아침마다 신문을 볼때면 가끔 짜증이 난다.「큰손」,「복부인」,「마담뚜」등의 말을 듣고 읽을 때마다 묘한 기분을 느낀다는 것. 장씨는『그런 말들이 공공연히 통용되는 것을보면 사회전체가 범죄소굴처럼 느껴지고 우리모두가 범죄자인것만 같다』고 말했다. 은어가 상징하는 말의 이중구조현상은 정치·행정에서도 새로운 기술로 자리잡으며 은어유행의 또다른 배경이 되고있다.
각종 정치적이슈가「현안」으로, 물가인상이「현실화」로 둔갑을 하게되면 언어의 벽은 때로 단절의 벽이 된다.
반정부학생시위나 학생운동을「학원사태」라는 모호한 말로 표현하기 시작한것은 7O년대 이후.
대학가에서는「학원사태」의 뒷면에서 많은 새로운 은어들이 등장했다.
「검은별」,「빵잽이」(시위를주동해 감옥에 다녀온 학생),「D데이」,「데이트하는날」(시위하는 날),「도바리」(경찰에 쫓겨 피해다니는학생),「잠수하다」(도망치다),「블랙하우스」,「레드룸」(학생들이 잡혀가 조사받는기관),「짭새」,「까바리」(사복형사),「안드로메다군단」,「로마병정」(방석모를쓰고 방패를든 전투경찰),「소림사유격대」(학생시위를 앞장서서 막는 요원을),「피」(유인물) ,「언더」(지하서클) ,「나이트클럽」또는 줄여서「나클」(야학)등 이루 헤아릴수없이 많다.
대학사회에서 만들어진 은어가 사회전반으로 유행되기도 하고 사회일각의 유행어나 조어가 대학사회에서 다시 각색되기도 하는등 은어는 확대재생산의 범람현상을 빚고 있다.
말의 의도적 왜곡·변질현상이라고도 할 은어의 범람은 말의 바른구사가 제한되거나 위험시되는 풍토의 소산. 그러나 그 결과는 말의 혼란에서 의식의혼란으로 유도될 가능성도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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