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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과 활인도(活人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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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하지만 이는 정확한 답이 아니다. 공자의 정명주의(正名主義)를 빌리지 않더라도 "검찰은 검찰다워야 한다"는 지극히 간단한 논리가 해답일 것이다. 검찰이 검찰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검찰의 존재이유는 없어지고 망한다. 그럼 검찰의 기능은 무엇인가. 검찰은 추상과도 같은 법 집행을 통해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존재한다. 준 사법기관이지, 대국민 서비스 기관이 아닌 것이다. 서비스니 친절 운동이니 하는 것보다는 수사를 통해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법 집행도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공평무사하게 이뤄져야 한다. 국민이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염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검찰의 구성원들도 최소한의 염치와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 송광수.김종빈 전 검찰총장 등이 '선비론'을 강조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꼿꼿한 지조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 옳은 일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던 선비상이 오늘날 검찰 구성원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이 두 사람의 당부였다. 나약하고 왜소한 지식인과는 대비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검찰이 망하는 시나리오는 검찰이 검찰답지 못하고, 검사들이 검사스럽지 못하다는 전제에서 만들어져야 할 것 같다.
정상명 검찰총장 체제도 자칫 '검찰답지 못한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여러 현안을 안고 있다.
김종빈 전 검찰총장의 사퇴 파문까지 몰고 온 강정구 교수 사건을 비롯해 국정원 도청사건, 법조브로커 윤모씨 사건 등이다. 이들 사건은 정 총장 체제의 내성을 시험할 수 있는 리트머스지로 작용할 것이다.

강 교수 사건의 경우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지휘권 발동을 이유로 적당한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하면 검찰은 망한다. 정치인 출신 장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생각에 자신들의 의견마저 숨긴다면 이는 검찰다운 행동이 아니다. 추가 수사에서 강 교수의 이적(利敵)성이 명백하게 드러나면 과감하게 '구속 의견'을 내야 한다. "역시 검찰은 안 돼"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검찰의 존재 이유를 보여줘야 한다. 국정원 도청사건 수사 과정에서 불거져 나오고 있는 정치권의 '잡음'에 흔들려도 검찰은 망한다. 이 사건의 본질은 국가기관에 의한 불법행위다. 본질을 제쳐둔 채 곁가지에 매달리는 것은 검사스럽지 못하다. 최근 전직 국정원장들에 대한 구속을 놓고 현 정부는 물론 김대중 정부 사람들의 '무도한 언행'에 검찰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법조브로커 사건의 경우도 엄정한 수사가 필요하다. 검사스럽지 못한 검사를 솎아내지 못하고 구차한 변명을 하면 검찰은 망한다. 불교의 선가(禪家)에서는 칼의 양면성이 곧잘 인용된다. 누가 칼 자루를 쥐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활인도(活人刀)'가 되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살인검(殺人劍)'도 된다는 것이다. 검찰이 망하는 시나리오를 피하려면 주어진 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답은 분명하다.

박재현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