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근·용답동 가스 기사 동행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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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서울 성동구 용답동 주택가에서 도시가스 공급업체 직원이 요금을 연체한 주민과 상담하고 있다. 사진 왼쪽은 숫자판이 멈춰선 가스 계량기 모습. 김상선 기자

"아무도 안 계세요? 도시가스에서 나왔습니다."

25일 오전 A도시가스 행당지역관리소의 한상길(30) 계장은 서울 성동구 사근동의 반지하 단칸방의 문을 두드렸다. 20대 초반의 여성이 창백한 얼굴을 문밖으로 내밀었다. 방 안에는 두터운 솜이불이 깔려 있었고 문 앞에는 일회용 가스통이 여러 개 나뒹굴었다. 도시가스로 난방과 취사를 해오던 이 집은 5월부터 가스공급이 끊겼다. 1월부터의 요금 29만원을 연체했기 때문이다. 한씨의 연체 요금 독촉에 이 여성은 "아버지가 아파 어머니가 생계를 잇고 있다"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취사를 어떻게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휴대용 가스 버너에 라면을 끓여 먹는다"고 답했다.

◆ 전국 9만여 가구 가스 공급 중단=산업자원부에 따르면 올해 요금 연체로 가스가 끊긴 가구는 9만1000여 곳. 전국 1063만여 도시가스 가입 가구의 0.8%에 해당하지만 2003년보다 3만여 가구가 늘어났다. 가스가 끊긴 가정은 매월 7만, 8만원의 가스비를 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체 가정을 상대로 요금을 독촉하거나 가스 끊는 일을 하는 한씨는 하루 평균 20가구를 방문한다. 그가 속한 행당지역관리소에서 담당하는 5만3000여 가구 중 가스가 차단된 곳이 700여 곳. 고액체납으로 분류된(25만원 이상) 경우도 160가구에 이른다. 기자는 한씨와 동행하며 가스가 끊긴 사람들을 만나봤다. 도시가스 요금이 3개월 이상 밀리면 가스업체는 통상 각 가정에 설치된 가스밸브를 잠근다. 사용자가 무단으로 밸브를 연 게 확인될 때는 특수 잠금장치를 설치하기도 한다. 한씨는 한 중국식당을 찾았다. 넉 달째 요금 270만원을 연체해 규정대로라면 이미 가스를 끊었어야 하지만 주인 김모(48)씨의 통사정에 한씨는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씨는 "가스가 끊기면 어떻게 장사를 하느냐"며 "다음달엔 100만원이라도 어떻게 해볼 테니 조금만 봐달라"고 말했다. 김씨는 "하루 20그릇 이상 팔리던 자장면이 요즘은 10그릇도 안 나간다"고 했다. 결국 한씨는 이날도 밸브를 잠그지 못했다.

다음 '고객'은 10년 넘게 서울 동대문에서 하던 옷장사를 올 봄에 그만뒀다는 최모(46.여)씨. 연체요금이 100만원이 넘어 가스가 반년째 끊긴 최씨는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씻겨 드릴 따뜻한 물이 없어서 동생집으로 보냈다"며 울먹였다.

◆ "저소득층 난방 지원 현실화돼야"=오후 3시가 돼서야 늦은 점심을 먹은 한씨는 "며칠 전엔 알코올 중독 아버지를 돌보는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을 보고 눈물이 나서 가스를 끊지 못했다"고 말했다. "40여만원이 연체된 전셋집을 찾아가서는 눈 딱 감고 가스를 끊었지만 하루 종일 가슴이 답답했다"는 그는 "사채업자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정부는 저소득층의 난방대책으로 최근 '저소득층에 한해 가스 중단 조치를 유예하라'는 공문을 전국 33개 도시가스 업체에 보냈다. 그러나 유예기간 중 사용한 가스요금은 모두 갚아야 할 빚이 되는 데다 대상이 기초생활수급대상(4인 가족 기준 총소득이 113만6000원 이하) 가구로 한정돼 실효성 있는 지원책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성동사회복지관 유시혁(35) 사회복지사는 "노동능력이 있거나 부양의무자가 살아 있는 경우 기초수급대상으로 선정되기 어렵다"며 "정부가 난방.온수.취사 문제의 3중고를 겪고 있는 가정을 파악해 실질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권호 기자 <gnomon@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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