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기미∼경자년 교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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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행하던 김대왕대비는 1839년 12월10일 「옥중천주교인의 조속한 처결」을 명령했다.
이같은 명령이 내려지는데는 조만영을 정점으로한 담양 조씨 세도의 압력과 책동이 크게 작용했다.
구체적으론 그해 12월 역대 임금의 화상을 모셔둔 경복궁이 불타는 등의 천재지변이 일자 조씨 세도정권측은 모든 흉측한 일들을 「올해안」에 척결, 밝은 새해를 맞자는 명분을 내세워 천주교인 처형을 서둘렀다.
그래서 기해교난의 말미로 이해 12월29일 서소문밖의 천주교인 7명이 참수됐다. 조속처결 명령으로 시작돼 경자년 (1840변) 4월까지 순교, 이번 성인품에 오르는 순교자는 모두 23위(도표)-.
이들 성인은 대체로 「양반가문」의 출신이 많았다.
홍병주형제·이문우·이영덕·한영이· 조증이 성인등은당대의 명문 양반집 후손들이었다.
이는 천주교가 사양길의 양반 후예들에게 수용돼 병든 왕권의 봉건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아야겠다는 혁세의 「민중의식」으로 연결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같은 몰락 양반들의 신학문 수용은 후일 동학·증산교·원불교등의 민족종교에서 표출되는 근대민중의식의 후천개벽사상 (혁명이데울로기)을 배양한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다.
정하상·정정혜 성인의 어머니인 유소사 성인은 서소문밖의 7인 참수에 앞서 11월23일 옥사했다. 유성인은 79세의 고령으로 당시 국법이 노인의 참수를 금하고 있어 12번의 문초를 통한 매질로 옥사케 했다.
기해말 7인 순교자는 천주교집안으로 아내·아버지·어머니·누님·언니·딸등이 앞뒤로 순교를 당했다.
한영이· 이영덕· 최창치 성인은 각각 몇달뒤에 순교한 권진이·이인덕·손소벽 성인의 어머니·언니·남편이다.
경자년 1월초 교수된 이아가타는 미모의 17세 처녀였고 김테레사는 김대건 성인의 당고모였다.
이아가타는 욕을 보이려고 흉측한 옥졸들이 있는곳에 가두었으나 끝내 정조를 지켰다.
순교자들에 대한 형조의 판결문은 하나같이 『사학을 깊이 믿고 외국인을 만나 이를 숭배하였으니 처형함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경자년 1월30일∼2월1일사이에 당고개 (현재의 서울효창공원부근)에서 참수된 10인의 성인 가운데는 당시 형조판서 친척이던 홍병주·홍영주 형제도 있다.
명문 양반 홍낙민의 손자인 이들 형제 성인은 홍판서가 스스로 심문을 못하고 부하들에게 맡겨 갖은 고문을 가하며 배교를 권했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이문우성인은 명문출신임을 감안,포도대장이 직접 술대접까지 하며 배교를 권유했으나 끝내 거절하고 강도수용 감옥에 감히는 곤욕을 당하기도 했다.
관원의 앞잡이로 나선 배교자 김순성은 응큼한 마음을 먹고 미모의 경자년 순교자 권진이·이환이등을 자신이 맡겠다고 나섰다가 욕설만 얻어먹는 봉변을 당했다.
이어 옥리등이 이들을 도망가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모사는 급기야 사건화돼 관련 옥리들이 귀양을 가고 권·이 성인들은 다시 붙잡혀 순교했다.
허협 성인은 훈련도감의 현역 군인이었다. 그는 고문에 못이겨 일시 「배교」를 선언, 석방되기도 했으나 곧바로 판관에게 다시 달려가 「불변의 신심」을 보이며 고문을 자청했다.
판관은 인분통을 놓고 신심의 불변을 증거하려면 오물을 마시라고 하자 서슴없이 꿀꺽 마셨다. 두번째 마시려하자 옥리들이 달려들어 말렸다.
교난중 포졸들에게 농락당한 처녀교인도 적지 않았다.이들은 순교까지는 안갔지만 정조농락을 통곡하는 「눈물의 바다」가 전국방방곡곡에 그득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기해인자교난의 갖가지 순교기록들을 담은 『기해일기』는 현석문 성인이「앵베른 주교의 명을 받아 3년동안 수집,정리했고 땅속에 묻어 보관돼오다가 1847년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내져 1905년 서울에서 출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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