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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김정은, 공들인 마식령스키장 왜 발길 끊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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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마식령 스키장을 방문한 북한 주민들이 스키 강습을 받고 있다. [화보조선·노동신문]
2013년 12월 스키장 개장식에 참석해 리프트를 탄 김정은. [화보조선·노동신문]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의 원산 사랑은 각별합니다. 틈나면 이 지역을 찾아 군부대와 공장·기업소를 둘러봅니다. 제법 큰 규모인 ‘국가급 합동 군사훈련’도 원산에서 치릅니다. 미국산 세스나(Cessna) ‘172 스카이호크’로 파악된 비행기를 몰아 평양~원산을 오간 적도 있다고 대북 정보 당국자는 귀띔합니다. 최근 첩보위성을 통해 원산 특각(전용 별장)에 활주로가 새로 건설된 정황도 나타났습니다.

 이런 남다른 애정을 출생과 성장 비밀에서 찾는 시각도 있습니다. 재일동포 출신인 생모 고영희(2004년 파리에서 암 치료 중 사망)가 북송선 만경봉호를 타고 도착한 곳이 바로 원산항입니다.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시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눈에 들어 아들 정철(34)·정은(31)과 딸 여정(26)을 낳고도 김일성 주석의 인정을 받지 못해 고영희는 원산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고영희가 한때 ‘원산댁’으로 불린 것도 이 때문으로 보입니다.

 김정은의 원산 챙기기 정점은 마식령스키장입니다. 원산 인근 강원도 문천군 일대에 12개 슬로프를 가진 대형 스키장을 건설한 건데, ‘말도 힘들어 쉬어 넘는다’는 해발 768m의 마식령(馬息嶺)에 불과 8개월 만에 스키장과 호텔을 짓느라 군인 건설자와 돌격대가 말 그대로 속도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공사 기간 중 다섯 차례나 현장을 찾은 김정은은 2013년 12월 31일 준공식에선 스키도 탔다고 합니다.

 북한 선전 화보인 ‘조선’ 3월호엔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마식령스키장 기사가 실렸습니다. 스키는 물론 ‘휘거’(피겨스케이팅)와 ‘호케이’(하키)도 즐길 수 있어 “낭만과 정서로 이채를 띠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형형색색 옷차림을 한 스키 애호가들의 밝은 표정도 드러납니다. 스키장이 붐비는 것처럼 사진을 조작했던 전력이 있어 그대로 믿긴 어렵지만 평양과 일부 지방도시 상류층이 이용하는 건 사실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대목이 있습니다. 지난겨울 이후 김정은이 마식령스키장을 한 번도 찾지 않은 겁니다. 원산에서 미사일 발사와 군 훈련을 수차례 지켜보고, 지난달에는 원산의 육아원과 초·중등학원 건설장을 돌아봤다는 관영매체의 보도가 나왔지만 스키장은 끝내 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사 때 그토록 공들이던 것에 비춰보면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이를 두고 김정은의 건설 드라이브가 궤도 수정을 했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그는 권력을 승계받은 직후 능라인민유원지 내 미니골프장과 미림승마구락부, 문수물놀이장 같은 평양 특권층 위주의 위락시설 건설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민생과 동떨어진 이런 통치행보에 민심은 싸늘해졌답니다. 2012년 4월 첫 공개연설에서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실제 행동은 달랐기 때문일 겁니다.

 김정은의 변화는 지난해 11월 감지됐습니다. 마식령스키장을 포함한 김정은 시대 건설 프로젝트를 총괄한 마원춘 국방위 설계국장이 숙청된 겁니다. 평범한 설계사에서 일약 김정은의 최측근으로 떠올랐지만 하루아침에 몰락했죠. 자금과 건축자재를 빼돌렸다는 비리 혐의를 씌웠지만 여론 무마를 위해 희생양이 된 것이란 해석도 나옵니다. 그 자리는 새 얼굴인 조용원 노동당 부부장이 대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6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이 평양시 양로원 건설장을 찾아 “본보기 건축물로 세우라”고 지시했다고 전했습니다. 올해 첫 현장방문은 고아원을 택했고, 아이를 안고 눈물까지 보였습니다. 아동시설과 학교 건설에 큰 관심을 보이는 모습도 드러납니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민생 쪽으로 정책 방향을 튼 것이라면 다행입니다.

 걱정되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평양 양로원을 다음달 15일 김일성 생일까지 완공하라고 지시하는 등 공기 단축을 압박하는 겁니다. 수많은 인명피해를 본 지난해 5월 평양 평천구역 23층 아파트 붕괴사고의 악몽이 재연될까 우려됩니다. 스키장 건설 때 들고나왔던 ‘마식령 속도’가 최근 ‘평양 속도’로 슬그머니 간판을 바꾼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정은은 마식령스키장 건설을 통해 새로운 리더십을 과시하려 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 경제의 어려운 현실은 뒷심을 보태주지 못했고, 결국 스키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잠시 속도전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주민들이 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허리띠를 풀어 젖힐 수 있는 개혁·개방의 길을 스스로 찾을 때까지 말입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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