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3) 제80화 한일회담(122) 미대사의 고자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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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58년 9월11일 하오 나는 「다울링」주한미대사와 2시간여에 걸쳐 한일회담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다울리」대사도 「맥아더」2세 주일미대사와 비슷한 견해였는데 그에 앞서 50년대 우리 외교의 실상을 알리는 웃지못할 일화 한 토막을 먼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주한미대사의 한국에서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
요즘은 외무부 미주국장이 자연스럽게 미국대사를 상대할수 있지만 내가 외무차관이 된지 1년여까지도 미국대사의 상대역은 대통령과 외무장관 뿐이었다.
한국전의 참전주력부대 파견국인데다 전후복구사업에 막대한 원조를 하고 있다는 후광과 위세탓인지 미국대사들은 도무지 외무차관은 안중에도 없다는 식이었다. 외무차관의 상대역은 한심스럽게도 미국대사관의 공사나 1등서기관이었다.
그런데, 58년4월인가에 「다울링」대사가 제발로 차관실을 찾아와 나에게 국제해양법회의에서 미국입장을 지지해주도록 부탁하는 「사건」이 발생해 화제가 됐다.
「다울링」대사는 제네바의 국제해양법회의에서 영해3해리안을 주장하는 미국안과 여타국안이 팽팽히 맞서 있으니 한국정부가 표결때 미국안에 찬성하도록 이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영해3해리가 확정돼야 미국의 대북한정보수집도 원활해진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다울링」대사의 부탁을 받고 이틀만에 이대통령을 설득해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래서 윤찬비서관(현주페루대사)에게 「다울링」대사를 오라고 전갈하라 했더니 尹비서관은 『차관님, 「다울링」대사가 언제 미국대사관으로 오겠느냐고 묻는다』고 말했다.
윤비서관은 미국대사가 예에 따라 차관실을 방문할리는 만무하니 내가 그쪽으로 가는 것을 전제로하고 면담약속을 주선하는 것이었다. 비서관이 상관의 말뜻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면담약속을 하는 것이 조금도 허물일수 없는 상황이 당시의 서글픈 실정이었다.
나는 그게아니고 미대사를 내 방으로 부르라고 거듭 지시했는데, 그때 한동안 멍청하게 나를 쳐다보던 윤비서관의 모습이 여태까지 선명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런데, 한 열흘후인가. 「다울링」대사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방으로 쳐들어오다시피 와서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닌가.
영문을 몰라하는 나에게 「다울링」대사는 「로버트슨」국무차관의 전보를 내밀며 해명을 다그쳤다. 국제해양법회의에서 영해3해리안이 표결됐을 때 한국측의 기권때문에 빈반동수로 부결됐다는 내용이었다.
「다울링」대사가 당장 나와 함께 이대통령에게 가서 전말을 해명하라고 다그쳐 경무대로 갔다.
이대통령은 독림립동 당시부터 절친하게 지냈던 「로버트슨」 국무차관의 『내 입장이 곤란하게 됐다』는 전보를 보더니 나에게 『훈령을 제대로 내렸느냐』고 노기띤 음성으로 질책하고 훈령전문 사본을 요구했다. 사본 대조결과 지시사항에 이상이 없자 이대통령은 마침 서울에서 열리고 있던 유럽지역 공관장회의에 참석중이던 국제해양법회의 한국수석대표 김용우주영대사를 당장에 대통령 집무실로 불러들이라고 호령했다.
김대사는 『각하, 이것은 주권에 관한 문제…』라며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3해리 지지안을 훈령받은 김대사는 평화선문제도 있고 국제해양법회의의 분위기를 보니 영해확장이 우리에게 훨씬 유리할 것으로 판단해 이수영참사관(주불대사 재직중 자살)과 의논한 결과 행표를 던지는 것이 상책이나 본부훈령도 고려해 중립적 입장에서 기권했다는 것이다.
이대통령이 애국적 입장에서 본부의 훈령을 거역한 김대사에게 『공판장 회의에 더 참석할 필요가 없다』며 해직을 명해 나는 그 자리에서 김대사의 해직서를 써서 가만서명을 받았다. 한국에 드리워진 미국의 힘은 국방장관을 거쳐 1급지인 주영대사를 맡고 있던 김대사를 하루 아침에 사실상 파면시킬 정도였다. 그러니 미국대사가 일개 외무차관을 그때까지 상대역으로 치부할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나, 정확히 말하면 한국 외무차관은 이같은 불상사를 계기로 해서 이때부터 미국대사의 상대역으로 「격상」됐다. 이사건 직후부터 「다울링」대사와 나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자주 만났는데, 한일회담에 관해 「다울링」대사는 유태하씨의 보고와는 또다른 많은 정보를 내게 전해줬다. <계속><김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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