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CoverStory] 편지 언제 써봤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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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입니다. 그것도 늦가을입니다. 이맘때면 무슨 생각을 하세요? 올해도 다 갔구나 싶으면서, 일년 동안 소식 한번 제대로 주지 못했던 분들이 생각나지 않으세요? 이런 분들께 편지 한 통 써보세요. 물론 전화도 좋고 e-메일도 나쁘지는 않겠죠. 그렇지만 가을은 누가 뭐래도 편지의 계절 아닙니까. 지금 당장 편지지와 우표를 준비해 보세요. 그리고 편지지를 한 줄 한 줄 채워 보세요. 다 쓰셨으면 가까운 우체통을 찾아 나서세요. 오랫동안 타지 않은 자전거라도 끌고 나서면 근사하겠네요. 노래라도 한 자락 나직하게 흥얼거리면 더욱 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글=남궁욱 기자<periodist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디자인=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30여 년을 꼬박꼬박 … '편지 대장' 주은희 선생님

충남 연기군 봉암리에 있는 연봉초등학교 2학년 1반. 늦가을 햇살이 포근한 창문 앞엔 화분 두어 개가 놓여 있다. 천장으로 향한 노끈을 타고 화분에서 하늘로 향한 덩굴 몇 가닥. 지금은 금세라도 파삭하고 부서질 듯 메말랐다. 그런데 끈 중간 중간 쪽지들이 알록달록한 단풍같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아이들이 매달아 놓은 편지들이다. 들쭉날쭉 삐뚤빼뚤, 그리듯 써 넣은 글씨들이 아이들 목소리처럼 재잘거린다.

나팔꽃에도, 오이덩굴에도 편지 보내는 동심. 이 마음을 지키는 이는 이 반 담임인 주은희(52.사진) 선생님이다. '편지대장'으로 유명한 선생님. '그 선생에 그 제자'란 소리, 아니면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소리가 듣고 싶었던 걸까. 교실 안은 '편지투성이'다. 선생님 책상 위에는 '사랑의 편지'라고 적힌 공책이 차곡차곡. 유리문에도 '선생님 보세요'라고 시작하는 편지들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주 선생님과 편지의 인연은 길다. 교단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 1972년 봄. 말썽꾸러기들을 달래고 으르기에도 바빠 편지 같은 건 엄두도 못했다. 다만 아이들이 써오는 일기장에 짧게라도 한 줄씩 마음을 적어주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쓰다 보니 문장이 가진 힘을 알겠더란다. 백 번 체벌, 열 번 잔소리보다 아이들 생각을 빨리 그리고 바르게 자라게 해줬다.

이때부터 선생님은 편지를 썼다. 매일 수십 통씩 부칠 수 없으니, 일단 맡고 있는 반 아이들에겐 '일기장 편지'를 계속 썼다. 대신 더 길어지고, 자상해진 내용으로. "영희 머리핀이 참 예쁘더구나"에서부터 "아빠와 엄마도 싸우실 수 있는 거야. 철수도 친구랑 싸우잖아"까지 온갖 내용을 망라하는 편지들이었다. 한두 줄이나 적어 올까 말까 하던 일기가 선생님과의 편지로 변하자 아이들은 공책이 비좁다고 열심히 써댔다.

꾹꾹 눌러 쓴 '손 글씨'의 감동
e-메일로는 배달 안 되죠

학년이 높아져 품에서 떠난 아이들, 졸업한 아이들에겐 편지를 썼다. 20장짜리 전지 우표와 편지봉투를 가방에 넣고 다니던 시절. 틈만 나면 편지를 썼다. 집이 가난해서, 부모가 이혼을 해서…. 이래저래 엇나갈 뻔했던 사춘기들, 편지내용에 발길을 돌렸다. "초임 교사시절 제잔데, 명식이라고 있어요. 소위 문제아였는데, 걔한테 편지를 얼마나 썼는지 몰라요. 지금은 어엿한 40대 가장이죠. 요즘도 가끔 밥을 사겠다고 찾아와요."

"선생님! 편지 받으세요!" 연봉초등학교 2학년 1반 고사리손들이 푸른 하늘을 향해 종이 비행기를 날렸다. 날개마다 ‘선생님께’라는 서툰 글씨가 적힌. 모두 다 끌어안을 듯 두 팔을 벌린 주은희 선생님은 행복하기만 하다. 아래 사진은 주 선생님 반 아이들이 쓴 쪽지 편지들.

아이들과의 편지는 주 선생님에게 더 없이 소중한 일이었다. 그런데 1~3학년을 계속 맡으면 이게 쉽지 않았다. 아이들이 제 생각을 편지에 소소하게 담지 못 했기 때문이다. 대신 학부모와 자주 대화해야 할 필요가 느껴졌다. 그래서 선생님, 학부모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그게 벌써 17년 전. 아이들에게 공책 한 권씩을 나눠줬다. 그리고 그 겉장에 큼지막하게 '사랑의 편지'라고 쓰게 했다.

'사랑의 편지'는 학부모들과의 편지 교환장. 올해도 주 선생님은 이 공책을 쓴다. 방법은 이렇다. 매달 초 선생님은 '학급을 이렇게 운영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공통 편지를 쓴다. 수업 때 찍은 사진이 있으면, 붙여 주기도 한다. 그리고 부모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아이의 경우, 편지를 써 아이 편에 보낸다. 많이 줄었다곤 해도 한 반이 24명. 하루도 거르지 않고 써야 모든 부모가 한 달에 한 통은 받아 볼 수 있다.

달마다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 주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 그것도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그래서 편지로 개인적인 문제를 상담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아요. 이런 분까지 있어요. '못 참겠어요. 갈라설래요.' 이런 편지를 받으면 '누구나 이혼을 생각해요. 저도 그런걸요' 하면서 말리죠. 그러면 학부모들이 나중엔 '언니 같아요''누님 같습니다'라며 충고를 받아들여요. 제 편지가 여러 가족 살렸다니까요.(웃음)"

'일기장 편지'와 '사랑의 편지'. 이것들 쓰기가 어지간히 벅찰 텐데. 하지만 선생님은 아니란다. 무슨 시간이 남는다고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이 정말 많기도 많다. 우선 해외에서 선교사로 일하다 지난해 세상을 뜬 오빠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언니가 좋은 '편지 친구'였다. 직장 때문에 헤어져 살고 있는 큰딸과도 살가운 편지를 자주 주고받는다. 가끔은 함께 사는 남편과 작은딸에게도 편지를 쓴단다.

"지금 담임을 맡고 있는 아이들, 옛날 제자들이랑 친구까지 합치면 정기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는 이들이 40명 정도는 돼요. 아무튼 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요. 이렇게 많이 쓰다 보니 쓰기는 또 얼마나 빨리 쓰는지. 한 장 쓰는 데 뚝딱 5분이면 충분하다니까요. 하기야 연애할 때가 절정이었죠. 저랑 남편이 연애할 때 좀 유별났거든요. 글쎄, 어떤 날은 하루에 7통씩 편지를 주고 받았다니까요.(웃음)"

주 선생님, 알고 보니 '(사)한국편지가족'의 충청지회장이다. 편지가족은 우정사업본부가 주최하는 편지쓰기 대회 입상자들이 만든 단체. 전국 1000여 명의 회원이 디지털 시대에 맞서(?) 편지쓰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해마다 여름이면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편지쓰기 강좌와 경진대회를 연다. '편지로 여는 세상'이란 책자도 해마다 펴낸다. 주 선생님이 맡고 있는 충청지회의 회원은 130여 명. 꽤 큰 지회의 '대장'이다.

이런 선생님이니 요즘 가장 아쉬운 건 편지를 쓰는 손길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이란다. 보내는 숫자만큼 편지가 돌아오지 않는 건 벌써 한참 된 일. '사랑의 편지'에도 일년 내내 답장 한 줄을 하지 않는 학부모까지 제법 생겼다. 손마다 휴대전화가 들려 있고, 집집마다 인터넷이 깔려 언제든 채팅을 하거나 e-메일을 쓸 수 있게 된 때문이리라. 세상이 바뀌었느니,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싶지만, 선생님은 애가 탄다.

<충남 연기> 글=남궁욱 기자 <periodist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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