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2) 제80화 한일회담(121) 친공계교포 가석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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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북송희망의 친공계교포 가석방문제로 한일회담은 재개된지 3개월만인 7월 하순부터 사실상 중단상태에 빠졌다.
정부는 그러나 8월초 가석방 절대반대 입장에서 일보 후퇴,「기시」수상의 어려운 입장을 모면시켜 주기로 결정했다.
가석방문제때문에 자민당내 기반이 취약한「기시」수상이 사면초가에 처해 있다는「후나다」중의원의원등 친한로비집단의 간곡한 고충을 전해듣고 그를 궁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정부는 일단 가석방은 양해키로 결정했으나 단서조항을 붙였다. 일본이 가석방하는 친공계교포를 북한에 보내지 않겠다는 서면보장을 하고 이같은 잠정적 현안의 해결은 종국적으로는 한일회담 전체회의에서 결론이 나야한다는 정부입장을 8월12일 비망록으로 일본측에 수교했다.
「기시」수상은 이에 대해 사의를 표했으나「후지야마」외상과「아이찌」(애지규일) 법상이 한사코 서면보장을 할수 없다고 주장해 새로운 불씨를 던졌다.
그래서 정부는 일본측의 끈질긴 요청에 따라 8월20일 처음 열리기로 합의했던 어업 및 평화선문제 분과위 제1차회의를 유산시켰다.
임병직수석, 장경근대표, 유태하공사는 8월21일「더글러스·맥아더」2세 주미대사를 만나 일본이 서면보장을 해서 한일회담의 정상화를 이룰수 있도록 주선해달라고 요청했다.「맥아더」원수의 조카인「맥아더」대사는 일본측이 친공계교포를 북송하지 않겠다고 미측에도 확약했다고 말하고 한국의 서면보장은 무리라는 견해를 밝혔다.
유공사가「기시」수상,「사와다」수석대표,「야마다」외무차관의 태도는 성실하나「후지야마」외상은 한일 관계에 이해심이 부족하다고 하자「맥아더」대사는 말문을 닫아버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기시」수상은 이즈음「후지야마」씨를 외상으로 기용한 것이 실책이였다고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후지야마」외상은 한일문제뿐 아니라 중국문제 등 대외문제에도 수상의 반공입장과는 달리 친공입장을 천명해 물의를 빚고 있었다.
「후나다」의원은「후지야마」외상과 개인적으로 가까왔으나 그의 외상기용은 수상의 큰 실책이었다고 유공사에게 지적했다.
서면보장문제만 해도 법무성의 반대 태도보다「후지야마」외상의 반대강도가 훨씬 컸을 정도였다.「기시」수상이 외무성과 법무성의 의견을 물리칠수 없었던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법무성 사무차관은 현행 일본법을 고려치 않고 한국측 입장을「기시」수상이 받아들인다면 사직하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기시」수상이 일개 사무차관의 으름장에 속수무책일수 밖에 없었던 배경은 이러한 했다. 「사또 (좌등영작) 장상이 자민당 간사장 시절 선박스캔들에 연루되어 실형을 선고받을 위기에 처했을 때 당시「요시다」수상이 개입해 가까스로 화를 면했는데, 그때 담당검사가 현직 법무성 사무차관이었다.
「사또」장상은 후에 내가 주일대사시절 한일국교 정상화를 타결한 일본 수상으로「기시」수상의 동생이다.
이같은 형편이니「기시」수상도 법무차관을 호락호락하게 대할수 없었던 것이고 게다가 자민당내에 큰 영향력을 가진 세력이 법무차관을 정의의 인간으로 떠받들어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북송문제를 둘러싸고 일이 어렵게 꼬임에 따라 나는 9월8일 상오 경무대에서 이대통령을 1시간여 뵙고 가석방문제 경위와 앞으로 정부가 취할 대책을 소상하게 보고했다.
나는 주일대표부의 건의와 외무부의 분석결과를 토대로 양측간의 이견이 일본 국내 사정으로 봐서 우리가 바라는대로 해결되기는 어려운 실정이므로「기시」수상의 선의를 믿고 구두약속으로 이 문제를 잠정적으로 타결하되, 곧 중단된 한일회담을 재개해 이 문제를 정식의제로 해결짓도록 하는 것이 낫겠다』고 이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그리고 재개될 회담에서 우리측이 제의할「재일교포의 국적 및 처우에 관한 한일정부간의 협정」안을 설명했다.
이대통령은『김차장, 보고한대로 주일대표부에 훈령하되, 될수록 유리한 방향에서 타결짓도록 최대한 버텨보라고 지시해』라고「가만」서명을 했다.
나는 이에따라 대통령의 지시를 보충해서 9월 하순 주일대표부에 훈령했는데, 회담재개 의사는 비공식적으로 하도록 지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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