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진 기자의 아웃사이더] 비판(批判)과 비난(非難)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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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청기 감독은 요즘 시간이 날 때마다 동양화 속 태권V를 주제로 수묵화를 그린다. 1997년 ‘의적 임꺽정’을 마지막으로 작품을 중단했던 그가 다시 영화를 준비 중이다. 김 감독은 “마지막으로 꼭 3D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현역이다. 김경록 기자

인터넷을 하다보면 얼굴을 찌푸리게 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댓글 때문입니다. 합리적 토론은 상실된지 오래죠.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는 고사하고 이 표현들이 사람의 입에서 나온 걸까 싶을 정도로 무서운 욕설들이 난무합니다. 그런데 익명에 기반한 욕이 묘한 매력을 가집니다. 은밀하고 짜릿하죠. 어떤 때는 쾌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욕이 너무 난무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냐,남들도 다 그런데 뭐’라는 식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비판(批判)이 아닌 비난(非難)이 표현의 자유라는 탈을 쓰고 정당한 의견표출로 포장되기도 합니다. 기자인 저 또한 그런 유혹에 흔들립니다. 비판(批判)은 어렵지만 비난(非難)은 쉽거든요. 하지만 얼마 전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그 일 이후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게 됐습니다.

당신의 역사에서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2015년 2월 25일자 강남통신)를 다루기 위해 태권V를 만든 김청기 감독을 만났습니다. 김 감독은 태권V를 비롯해 50여 편의 애니메이션과 어린이 영화를 제작하며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길을 닦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애니메이션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태권V를 흥행시키며 처음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줬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표절 감독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82년 ‘슈퍼 태권브이’ ‘초합금로보트 쏠라 1, 2, 3’, 83년 ‘스페이스 간담V’, 85년 ‘로보트군단과 메카3’, 그리고 86년 ‘우뢰매’ 등 여러 작품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베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김 감독을 만나기 전 그를 둘러싼 수 많은 논란과 기존의 기사를 조사했습니다. 여론은 당시의 열악한 환경을 이해해야 한다는 상황론과 엄연히 표절이다라는 비판론으로 나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의 작품과 일본 애니메이션을 비교하며 어떤 부분이 표절인지에 대해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비판했습니다. 합리적이고 상당한 근거를 둔 비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상당 수 사람들은 마치 김 감독이 한국 애니메이션을 망친 사람 인양 자극적인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그런 비난 속에 합리적인 근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극적인 논쟁점은 기자에겐 상당히 좋은(?) 취재거리입니다. 소재 자체만으로도 독자의 관심을 끌 수가 있기 때문이죠. 직업병이 발동했습니다. ‘왜 그랬냐?’고 시원하게 물어보자고 생각하면서 인터뷰 장소로 갔습니다. 하지만 이내 제 자신감은 여지 없이 무너졌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방 흥행사들과 극장주들의 횡포, 당시의 열악했던 투자 환경, 일본 로봇 디자인을 노골적으로 베끼자는 은밀한 제안 등 그의 기억 속엔 80년대 부끄러운 한국이 있었습니다. 제작비 조달이 어려웠던 그는 일본 로봇 디자인을 베낀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제작비의 절반을 대겠다는 한 완구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김 감독은 “현실과 타협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사실 이 때까지도 김 감독의 설명에 저는 선뜻 동의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순간 ‘상황을 탓하는 것은 변명이 아닐까’라며 속으로 그를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 다음 김 감독의 답변에 그때까지 유지했던 저의 경계심은 풀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제안을 안 받아들이면 서울동화 문을 닫을 상황이었어. 나 혼자는 괜찮아. 그런데 태권V부터 수 년을 함께 고생했던 회사 동료들은? 20여 명이 한 순간에 거리로 나앉아야 되는 상황인데…기자 양반,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어?”

자극적인 주제만을 쫓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던 순간이었습니다. “당신은 그럴 수 있겠느냐?”란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김 감독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거침없이 질문을 쏟아내겠다던 태도는 알고보니 자신감이 아니라 오만함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나라면 어땠을까’란 질문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지금도 그 답은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비판은 어렵고 비난은 쉽다는 사실이죠. 그리고 누군가를 비난할 자격이란 세상에 그 누구에게도 없다는 사실도 말입니다.

강남통신 정현진 기자 Jeong.hyeon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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