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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광주이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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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광주이씨는 조선조에서 상신(영·좌·우의정) 5명, 대재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낸 명문이다. 세종이후 5조에 걸쳐 「출장입상」했던 명신 이극배(영의정), 폭군 연산의 폭정에 서릿발같은 기개로 항거하다 숨진 이극균(좌의정), 선조조 「서정쇄신」의 기수로 역사에 남은 이준경(영의정),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명외교관으로, 명전략가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한음 이덕형(영의정) 등 기라성같은 역사의 인물들이 광주이씨 문중에서 나왔다.
조선조에 문과급제자가 1백88명, 이씨 가운데서는 전주·연안·한산이씨에 이은 랭킹 4위.
광주이씨는 그 뿌리를 1천6백년전의 신라에 두고있다. 원조는 신라 나물왕때의 내사령 이자성. 그러나 그 이후의 세계는 분명치 않다. 다만 후손들이 대대로 신라 칠원성(현경남함안)의 성백이 되어 살았다는 기록이 전해내려오고 있을뿐.
서기 935년 신라는 고려에 천년사직을 넘겼다. 이때 칠원성 이자성의 후손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왕건에게 끝까지 저항했다 한다.
이같은 이유때문에 고려는 그 후손들을 회안(현광주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켜 역리(역리)로 삼았다. 「광주」를 본관으로 삼게된 연유다. 신라귀족의 긍지를 지켜 고려에 충성을 거부했던 광주이씨는 고려조에서 수모와 인고의 세월을 살아야했다. 이들에게 관계진출의 문이 열린 것은 무신난,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 지배층이 개편된 24대 원종이후부터.
실로 3백여년만에 정치적 해금이 이루어진 것이다.
광주이씨를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중흥시조는 여말의 석학 둔촌 이집이다. 충목왕때 문과에 급제, 정몽주·이색·이숭인 등과 친분이 두터웠던 당대의 문장이었다.
그를 시발로 조선조들어 광이는 3백여년 잠재웠던 잠재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선초기의 이지직(태종·형조참의), 이지강(동·좌참찬), 이지유(동·사간) 등 3형제는 그의 아들들. 이때부터 광주이씨는 명문으로서의 기틀을 다진다.
신라의 이자성과 이집은 세계상 댓수를 헤아릴수 없다.
때문에 광주이씨는 이집의 아버지인 이당(고려 국자생원)을 시조로 받들어 6백년 혈맥을 잇고있다.

<세조때 「오극집」떨쳐>
이밖에도 광주이씨는 이양중(고려·형조참의)과 이관의(조선·학자)를 각각 파조로 하는 소파가 있으나 이당의 후손들이 주축을 이룬다.
조선 세조∼성종대는 광주이씨의 개화기-. 이장손(세조·사인), 이인손(동·우의정), 이예손(동·황해도관찰사) 등 3형제가 이 시기를 대표하는 광이의 인물들. 이들은 이집의 손자요 이지직의 아들들이다. 이들 3형제중 이인손은 극배(세조·영의정), 극감(동·이·형판). 극증(성종·이호·병판·좌참찬), 극돈(성종·이병·호판·좌찬성), 극균(연산·좌의정) 등 5형제를 두었는데 이들 모두 중앙관계에 진출, 세칭 「오극집」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이렇게 집안이 성세를 누리자 세조때 영의정 이극배는 이를 염려해 두 손자의 이름을 「겸」과 「공」이라고 짓고 『항상 겸손하고 공손하게 세상을 살도록 훈계했다』한다. 그는 세조때 북변에 침입한 야인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우는 등 다섯임금에 걸쳐 문무를 겸한 「출장입상」의 명신이었다.
역사의 어느 시점에 줄을 그어도 흥망의 굴곡은 있는 법. 한 가문의 역사도 예외일수 없다.
폭군 연산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면서 이극배의 집안은 「사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대표적 희생자가 5형제중 막내인 이극균. 그는 연산 등극후에도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연산의 폭정에 견제를 계속하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사약을 마시고 숨졌다.

<사화에 말려 희생>
이 사화에서 그뿐아니라 그의 아들 이세준(남양부사), 조카 세좌(극감의 아들·판중추) 등 20여명의 일족이 참화를 입었다.
연산조의 혼란기에 잠시 주춤했던 광주이씨는 명종∼선조대에 2명의 영의정(이준경·이덕형), 병조판서 이윤경 등을 배출하며 다시 융성을 회복한다.
이준경은 명종 20년 영의정에 오르고 선조즉위후 명종의 교지를 받들어 국정을 총괄했던 당대의 거목이었다. 그는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사림간의 알력을 조정키위해 억울하게 숨진 신진사림파의 기수 조광조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한편 고려충신 정몽주의 후손을 관계에 기용하고 재해때 백성들의 세공을 덜게 해주는 등 역사에 남을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오성 이항복과 나란히 문장과 벼슬에서 쌍벽을 이루었던 한음 이덕형은 선조조에 가문을 빛낸 광주이씨문중의 큰별.
32살의 젊은 나이에 대제학에 임명된 그는 오성의 「재기」에 비해 「덕망」으로 더욱 일컬어지는 큰 그릇이었다. 38세에 우의정을 거쳐 42세에 영의정에 오른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에 가 탁월한 외교전략으로 5만의 원병을 끌어들여 서울수복에 수훈을 세웠다. 전란중에는 병·이 조판서가 되어 구국의 헌신을 다했던 일꾼이었다. 그러나 그는 광해군 즉위후 광해의 폐모론에 반대하다 영상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죽마고우인 오성 이항복과의 아름다운 우정, 기지와 익살로 수놓인 많은 일화들이 지금도 역사의 향기로 전해온다.
이극기(세조·예조참판) 이준경(명종·이조참판) 이윤우(선조·병판) 이원정(효종·판서) 이담명(세종·이판) 이정립(선조·대사성) 이광악(함경도병마절도사) 등도 광이가 조선조에 배출한 인물들.
일제의 암흑기, 광주이씨는 항일의 대열에도 앞장섰다.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다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끝에 숨진 이병택, 상해임시정부의 행동대원으로 항일투쟁을 벌였던 이병택. 을사조약체결후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직한 이웅래, 3·1운동당시 33인의 한사람이었던 이종훈 등이 구국의 제단에 기록된 이름들.
해방후 광주이씨는 뿌리깊은 나무의 전통을 이어 사회각계에 많은 인재를 내고있다.
이용현(판사·법원공무원교육원장) 이용식(검사장·대검총무부장) 이용훈(서울민사지법부장판사) 이중재(전국회의원) 이영래(변호사) 등은 법조계·정계의 얼굴들.
언론계에는 전동아일보회장 이동욱, 중앙일보사장 이종기씨 등이 활약하고 있다.
이병희(한양대총장) 이부영(의박·서울대교수) 이기영(철박·동대교수) 이용각(의박·전성모병원장) 이휘재(농박·전서울대농대학장) 이민재(전강원대총장) 이원설(문박·전경희대부총장) 등은 학계의 면면들.
실업계에는 이창업(전제일모직사장) 이종환(삼영화학그룹회장·도유사) 이지재(퍼시픽호텔회장) 이종욱(삼철건설회장·수원대학이사장) 이종록(삼철주택회장) 이종엽(전조폐공사장) 이종엽(서울주철사장) 등이 있다.
글 김창욱기자 사진 양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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