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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셔먼이고 리퍼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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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희
박승희 기자 중앙일보 중앙선데이 국장
박승희
정치부장

은발에 검은 뿔테 안경은 가뜩이나 차가운 이미지를 더 차갑게 했다. 6명의 한국 기자가 돌아가며 한·미 관계, 한·일 관계, 대북 정책에 대해 어지럽게 물었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자기 페이스를 절대 잃지 않았다. 1월 말 주한 미 대사관의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만난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은 냉정, 그 자체였다.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북한 붕괴 발언에 어떤 배경이 있느냐고 묻자 “대통령의 발언에 내가 보탤 말은 없다”고 잘라 질문자를 머쓱하게 하기도 했다. 그의 답변은 절제돼 있었고 실수는커녕 도무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었다.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논란에 대해서도 셔먼은 “한·일의 과거사 화해(reconcile)는 미국에 큰 도움이 될 것” “고노·무라야마 담화가 매우 중요하다” 같은 정답만 말했다.

 그랬던 셔먼이었기에 2월 27일 카네기 평화 재단에서 한 발언은 충격이었다. 한·일 과거사 갈등을 부부싸움이나 아이들 싸움에 쓰는 ‘다툼(quarrel)’으로 표현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면서 ‘이른바 위안부(so called comfort women)’라는 표현을 쓰다니. 셔먼이 발언할 때 그 옆에 얼마 전 국무부 부장관을 그만 둔 빌 번즈가 동석해 있었다는 점도 예사롭지 않았다. 한 달여 전 코앞에서 본 셔먼과 어울리지 않는 그 표현들이 어떻게 등장했는지 영문 스크립트와 영상을 몇 차례나 돌려봐야 했다.

 외교관의 발언에는 늘 뿌리가 있는 법이다. 셔먼의 발언도 마찬가지다. 워싱턴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이래 한국과 중국의 밀착을 경계해왔다. 지난해 초 사석에서 만난 워싱턴의 싱크탱크 인사들은 한국을 보는 백악관과 국무부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고 여러 번 전했다. 그 뿌리가 살짝 드러난 일도 있다. 지난해 4월 방한에 앞서 중앙일보와 한 서면 인터뷰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박 대통령이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늘리고 건설적인 관계를 맺는 건 환영할 일”이라면서도 “한국의 안보와 번영의 기초는 어디까지나 미국”이라고 못박았다. 당시 한국 사회가 세월호 사건에 묻혀 있어 큰 논란이 되진 않았지만 미국의 속마음이 드러난 답변이었다.

 셔먼의 발언은 그 연장선이다. 한·미·일을 축으로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미국으로선 한국의 친중국 행보가 탐탁할 리 없다. 게다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놓고 중국의 눈치만 보는 한국 정부와 달리 일본은 입 안의 혀처럼 굴고 있다. 1월 말 중국-한국-일본을 차례로 돌아본 셔먼은 워싱턴에서 가진 ‘생각들’을 3국 방문에서 ‘실감’했을 수 있다. “한국과 중국이 이른바 위안부 문제를 놓고 일본과 논쟁하고 있다”며 한·중을 한데 묶어 일본의 반대편에 놓은 건 그런 실감의 결과다.

 셔먼의 발언은 그래서 1회성으로 치부해선 안 되는 일종의 외교 징후다. 좋은 외교관은 징후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징후가 고질로 번져 손을 쓸 수 없기 전에 고쳐야 한다. 한·미 동맹은 지금 롤러코스트를 타고 있는 중이다. 마크 리퍼트 대사 피습사건은 충격적이고 우발적이었다. 우발은 어디로 튈지 몰랐다. 다행히 리퍼트의 개인기로 사건은 수습되고 있다. 테러에 질려 있지 않고 “아임 오케이”라며 웃어보이는 네이비 실 출신 대사라서 다행스럽다. 전쟁을 함께 치르며 발전시켜온 한·미 동맹을 25㎝ 과도로 끊을 수 없다는 진단도 맞다.

 하지만 참고 묵혀온 감정들은 작은 부싯돌 하나로 불붙을 수 있다. 한·미 동맹이라는 큰 틀로 볼 때 리퍼트 사건보다 더 심각하게 봐야 할 건 셔먼의 발언이다. 외교부는 지금까지 한·미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언론들의 진단을 “한·미 동맹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다”는 레토릭으로 때워왔다. 리퍼트 사건은 셔먼의 발언을 봉합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외교만큼은 리퍼트 뒤에 숨어 있는 셔먼을 외면하려 해선 안 된다.

박승희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