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사채-완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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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요즈음 금융가에는 전에 없던 새 풍속도가 생겨났다.
급전이 필요하면 으례 단자 회사를 찾던 기업들이 이젠 증권 회사로 달려간다.
심지어 명색이 금융기관인 단자 회사조차 자금이 달려 급할 땐 증권 회사에 매달리며 SOS를 치는 형편이다.
이렇게 증권 회사가 빌려주는 돈이 많을 때는 1조원에 달한다.
대체 금융 기관도 쩔쩔매는 판인데 증권 회사가 무슨 돈이 있길래 이처럼 막강한 자금력을 발휘하는 것일까.
소위 「완매」라는 신종 사채를 발명해낸 덕택이다.
완매란 고객과 증권 회사가 사고 파는 이상적인 채권 거래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형식적으로는「완전히 합법적인 매매」라는 뜻에서 바로 완매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장술이고 사실인즉 전주가 채권을 담보로 해서 증권 회사로부터 일정한 이자를 보장받고 사채 놀이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최근의 시세대로라면 고객이 1억원을 완매로 증권 회사에 맡길 경우 연 13∼13· 5%의 이자를 선불로 받고 환매 채를 살 때처럼 3개월 후면 원금을 돌려 받게 된다.
겉으로야 고객 이름으로 된 통장에 1억원 어치의 채권을 산 것으로 기록되지만 뒷구멍으로 따로 4개월 후에 증권 회사가 되사준다는 것이 미리 약속되기 때문이다. 결국 채권을 담보로 잡아 3개월짜리 어음을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과 같다.
안전성으로 따져서 땅 짚고 헤엄치기요, 금리로 치면 1년 만기 정기 예금 금리 8%의 갑절이 훨씬 넘는다.
은행금리야 그나마 세금까지 제하고 나면 연 6·6% 밖에 안 되는데 반해 완매는 세금한푼 안 떼는데다 13% 이자를 3개월마다 복리 계산을 하면 16%가 넘는다. 게다가 가명까지 통하니 얼굴 감추기를 원하는 전주들로서는 이보다 안성마춤이 없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증권회사는 큰소리치며 기업들에 돈을 빌려준다. 보통 2%의 마진을 붙여 15%의 대출 이자를 받는다.
증권 회사가 어떻게 기업들에 돈을 빌려주는지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급전 50억원이 필요한 K물산은 단자 회사를 찾아가 어음 할인을 요청했으나 자금 부족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 대신 자기회사 발행 어음에 대한 지급 보증을 얻어냈다.
이것을 가지고 다음 찾아가는 곳은 평소에 채권을 많이 가지고 있는 보험회사나 공무원 연금공단이다. 단자회사의 지급 보증 도장이 찍힌 50억원 짜리 어음을 내놓고 그만큼의 채권을 빌린다. 채권이 있어야 증권 회사를 찾아가 완매 자금을 빌어 쓸 수 있기 때문이다(관계법에 따르면 증권회사는 채권을 담보로 해야 대출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K물산은 결국 돌고 돌아 단자 회사 지급 보증 수수료 1%, 채권 대여료 1·8%, 증권 회사 대출 금리 15% 등 공식적으로 들어가는 것만 쳐도 17·8%의 금리를 문 것이다.
은행 대출 금리 10%와는 비교도 안 된다.
외국에는 이처럼 증권 회사가 채권을 담보로 대출하는 제도가 오히려 널리 보급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행 완매 거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완매가 생겨난 직접적인 동기는 82년 6·28 금리 인하 이후 은행 금리와 함께 회사채의 발행 금리까지 4%씩 내린 데서 비롯됐다. 당시 회사채의 시장 수익률은 16∼17% 선이었는데 발행 금리는 12%로 낮췄으니 새로 발행되는 회사채가 팔릴리 없었다. 결국 발행을 알선하는 증권회사들이 안 팔리는 채권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떠 안았다.
증권회사들은 이것 때문에 극심한 자금난과 적자에 허덕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안 팔리는 채권을 소화해 보려고 기를 썼다. 여기서 생각해낸 묘안이 바로 완매다.
환매채처럼 되사줄 것을 약속하면서 높은 금리를 보장해 주면 채권이 팔리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헐값으로라도 팔아서 우선 당장의 자금난을 면해보자고 짜낸 궁여지책이었는데 막상 시작해보니 뜻밖의 대성공이었다. 고금리에다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부동 자금들이 다투어 몰려들었다. 아예 거래 단위도 1억원 이상만 취급했다.
뭉칫돈이 몰려들자 증권회사들도 생각이 달라졌다.
남아도는 자금을 기업들에 마진을 얹어 대출하기 시작했다. 시중 자금이 이처럼 증권회사의 완매로 몰려들자 은행이나 단자 회사에서 돈을 못 구하는 기업들은 자연 이쪽으로 몰려들 수밖에.
긴축 정책으로 은행과 단자 회사의 돈줄이 죄어드는 데다 잇따른 금융 사고로 종래 형태의 사채마저 움츠러들자 이 같은 현상은 급속히 가속되어갔다. 잔액 기준으로 1조원 규모라면 보통 3개월 단위로 거래되니까 연간 4조원이 이 완매를 통해 융통되고 있는 셈이다.
현행 저금리 체제가 빚어낸 일종의 자연 발생적인 신발명품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완매를 중심으로 금융사고가 터져 나오고 있다. 고객이 완매로 맡긴돈을 은행의 수기 통장처럼 빼내 증권회사 지점장들이 줄행랑을 놓은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거래 자체가 워낙 쉬쉬하는 사채 거래 형태를 취하고 있으므로 제대로 단속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정부 당국은 뒤늦게 완매에 대한 과세 방침을 들고나섰으나 과연 이 같은 완매 여부를 기술적으로 어떻게 가려낼지 의문이다. <이장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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