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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여행을 떠나다, 타인의 고통을 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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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저자는 그림자의 어둡고 슬픈 모습이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기도 한다”고 말한다. 사진은 작가 브론테 자매가 나고 자란 영국 중부의 작은 마을 하워스. [사진 추수밭]

그림자 여행
정여울 지음, 추수밭
384쪽, 1만5000원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만의 방이 있다. 물리적인 공간을 뜻하는 게 아니다. 문학평론가인 저자의 말처럼 “지상에 있는 방은 언제든 누가 찾아올 수도 있고, 내가 울고 있을 때 누군가 벌컥 문을 열 수도 있지만” 이 방은 “내가 입을 열어 공개하지 않는 한” "아무도 쳐들어 올 수 없는” 마음 속의 방이다.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등 인문적인 여행기로 이름난 저자는 이 책에서도 자신의 방을 조금씩 열어 보인다. 그 계기가 되는 것은 동생·조카와 난생 처음 꽃구경에 나선 일상일 수도, 사려 깊은 다른 저자의 책일 수도, 그 자신의 말마따나 ‘영혼의 비상식량’인 여행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그는 한때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두려워 그저 받아들였던 고독, 하지만 이제는 자신을 온전히 응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찾곤 하는 고독의 시간에서 얻어낸 사유를 단정한 문체로 풀어간다.

 이 책에는 50편의 에세이, 그에 곁들인 사진 50편이 담겨있다. 사진은 대개 이국적인 여행지에서 포착한 것이지만, 이 책은 그 여행기가 아니다. 여러 책과 저자, 영화가 언급되지만 그저 감상문·비평문도 아니다. 굳이 여행기라고 부른다면 내면과 사유의 인문학적 여행기다. 떠오르는 바를 그저 쏟아내는 대신 자신에게 참고가 됐던, 그리고 독자에게 참고가 될 인문학적 모티브를 꾸준히 행간에 담아 정제한다. 이 책의 마지막에 부록 형식으로 ‘함께 보면 좋을 책들’이 실려 있는 것도 그 때문인 듯싶다.

 저자의 시선은 자신에게서 출발해 세상에 대한, 다른 이들과 공감하는 삶에 대한 관심으로 거듭 확장되곤 한다. “세계의 의미를 오직 ‘나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이기심과 결별할 때 우리는 타인의 결을, 사물의 결을, 세상의 결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문장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시선은 ‘개인적 존엄’과 ‘사회적 존엄’에 대한 구별로도 연결된다. 어떻게든 참고 견디며 개인의, ‘나만의’ 존엄을 지킬 수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타인의 존엄이 훼손되는 상황을 지켜보는 무력감·죄책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수많은 여행지를 다녀본 저자는 낯선 이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 나 자신을 찾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의미라고도 말한다.

 이런 글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 빨리 돌아가는 세상에서 언뜻 떠올랐으나 쉽게 붙잡지 못하던 생각이 비로소 정리되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혹자는 미처 정면으로 응시하기 겁내던 마음 속 깊은 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이는 용기 역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저자의 글쓰기인 동시에 독자의 글쓰기를 자극하는 촉매가 될만하다. 글쓰기에 대한 색다른 힌트도 있다. 글머리에 나오는 ‘방’은 저자가 본래 ‘꿈’에 대한 비유로 쓴 표현이다. 자신의 꿈을 기록하는 일기를 써 본 그의 경험처럼, 간밤에 꿈 속에서 벌어진 일을 나만을 위한 글로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꽤 수확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S BOX] “최고의 독자는 나 … 삶으로서의 글쓰기를”

글쓰기가 너무 가벼워진 시대, 그래서 역설적으로 글쓰기의 책임감이 새삼 강조되는 시대다. 저자는 ‘이벤트로서의 글쓰기’ 대신 ‘삶으로서의 글쓰기’를 권한다. 주목받기 위해, 유명해지기 위한 쓰는 글이 아니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 그래서 스스로 상처를 진단하고 치유하고 극복하게 하는 글쓰기다. 좋은 평가를 못 들으면 어쩌나, 아무도 읽어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보다는 지상 최고의 독자인 ‘나’를 먼저 염두에 두라는 권유다.

 그는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를 할 때마다 수강생에게 세 가지를 권한다. 첫째, 인터넷 시작 화면을 도서관이나 서점 홈페이지로 바꾼다. 포털의 자극적 콘텐트 대신 책에 대한 정보로 하루를 시작하라는 것이다. 둘째, 한 달에 한 권이라도 읽기 시작한 책을 끝까지 읽는다. 마지막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곧바로 글로 표현하는 습관을 들이라는 것이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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