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 사스가 '만만디' 바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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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흔히'만만디(慢慢的)'에 덧붙여 '대륙 기질'로 중국인을 인식하는 한국인이 꽤 많다. 중국인은 느긋하고 매사에 서둘지 않으며, 긴 안목으로 사물을 내다보는 통 큰 사람이라는 것이다.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이 같은 중국인관(觀)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실제 중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물으면 "상당한 오해"라는 답을 듣게 된다.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이 할퀴고 지나간 요즘 중국에서는 스스로 국민의식을 돌아보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중국 대문호 루쉰(魯迅)이 1925년 출판된 대표작 '아Q 정전(阿Q正傳)'에서 국민성을 통렬히 비판한 것을 떠올리는 사람도 적잖다.

중국인이 각종 매체와 인터넷에 올린 '사스를 겪은 뒤 생각해 보는 우리의 결점'들을 정리해 보면 대강 이렇다.

첫째, 매우 이기적(自私自利)이다. 사스 감염이 의심되는 지역 주민들이 "우리는 결코 사스에 걸리지 않았다"며 조사를 거부한 점, 격리시설이 들어설 지역의 주민들이 시설 예정지의 집기를 불태우며 난동을 부린 점 등이 예시됐다.

둘째, 명철보신(明哲保身)이다.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병균의 확산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상부에 "아직 커다란 문제가 없다"는 허위 보고만 한 관료적 병폐를 꼬집은 말이다.

셋째, 이문을 거침없이 탐내는(貪利) 속물적 근성이다. 사스가 횡행하는 시점에 "사스에 잘 듣는다"며 무려 1천4백여종의 가짜 약이 쏟아져 나왔던 현상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녹두가 사스에 특효가 있다고 해서 일부 지역의 녹두값이 폭등하고, "막 출생한 아기가 이러저러한 사스 처방을 입으로 얘기했다"는 소문에 귀기울이는 중국인의 미신적 성향과 맹목적인 군중성도 반성의 장에 올려졌다.

한국인도 함께 반성해야 할 대목이겠지만 중국에서는 공중도덕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게 확실하게 느껴진다.

거리에 마구 침을 뱉고, 쓰레기를 이웃집 울타리 너머로 투기하고, 정지 신호에 걸린 자동차 밖으로 재떨이를 비우는 광경 등은 낯설지 않은 중국의 풍경이다.

중국인들은 이제 사스로 새삼 인식하게 된 자화상의 본질적 문제점에 눈을 돌리고 있다.

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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