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 남기고 인생진로 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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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입원서 접수 마감일인 9일 하오.
마감을 30분 앞둔 하오5시30분까지 서울대학은 23개 과가 미달이었다.
방송을 통해 5시 현재 지원상황이 발표되고 미달학과가 판명되자 그때까지 눈치를 보며 맴돌던 1천여 명의 지원자들이 한꺼번에 행동을 개시했다.
미달과로, 낮은 과로-. 창구는 순간에 꽉 찼다.
78명 정원에 23명이 원서를 내고 있던 토목공학과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원자가 1백30여명으로 늘어났으며 그 밖의 미달과도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듯 차고 넘쳤다.
전체 지원자의 10%에 가까운 숫자가 마감 30분전에 「인생의 진로」를 결정했다.
마지막까지 이대와 서울대를 오락가락하다 미달소식을 듣고 하오 6시 교문을 닫기 직전에 이대서 서울대로 뛰어와 접수를 하는 H양은 숨이 턱에 차 교문을 뛰어들며 거의 실신지경이었다.
선 시험·후 지원으로 입시 제가 바뀐 지 올해로 4년째.
「눈치지원」은 이제 대학입시의 필요 불가결한 일부로 정착돼가고 있다. 그 역으로 일부에서는 「배짱으로 사는」용기(?)도 얘깃거리를 만들고 있다.
초기에 극적으로 나타났던 미달사태는 해를 지날수록 완화돼 새 입시제도가 어느 정도 정착돼 가는 인상을 주고는 있다. 문교당국은 그런 점에서 안도의 가슴을 쓸어 내리는 것도 같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나 자명하다. 대학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무엇을 해야하는 곳인가. 대학의 사명과 역할에 대한 원론적인 한마디 물음에서 당국의 안도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이며 몰리성의 것인가는 단번에 드러난다.
「과외추방」을 절대명제로 두고 입안된 이른바 교육개혁, 특히 현재의 입시제도는 과외는 추방했을지 몰라도 과외와 함께 「대학 자체를 추방해 버렸다면 과장의 억단일까.
대학 학력고사 정적을 기준으로 전국대학의 서열화가 진행되고 있다. 대학마다의 개성이나 학풍·전통은 『붙고 보자』의 눈치지원에서 토대가 허물어지고 있다.
『소신껏 지원하라』는 좋은 말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수험생이나 학부모에 1차 적 책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입시제도 아래서 어느 누가 「눈치지원」을 비난만 할 수 있을까.
대학이 눈치나 요행으로 골라잡아 들어가서 「정원제」악몽에 눌려 움츠려 4년을 보내며 취업 준비해 사회에 나와도 좋은 것이라면 현재의 입시제도도 좋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대학을 적어도 사회의 리더를 양성하는 최고학부로 규정한다면 쇠불 고치다 소 잡는 꼴의 현행 입시제도는 개선이 돼야 한다.
제도란 어느 것이나 일장일단을 갖는다고 보아야한다. 현재의 제도가 절대로 나쁘고 과거의 제도가 좋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그 반대도 또한 마찬가지다. 선택은 그 장·단의 비교에 있고 기준은 교육의 본질을 더 음미하는데서 스스로 드러나리라 믿는다.

<이덕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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