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로금리 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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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금리를 제로(0) 수준으로 낮추고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는 '양적 (통화)완화정책'을 언제 해제할 것인가를 놓고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과 정치권이 치열하게 맞서고 있다.

일은은 "이제 때가 됐으니 내년 초쯤 해제하자"는 쪽인 반면 정치권은 "확실하게 디플레이션에서 빠져나온 것을 확인 후에 해제해도 늦지 않다"는 주장이다.

양적 완화정책은 2001년 3월 경기활성화를 위해 일은이 도입했다. 장기불황과 디플레에 빠진 일본 경제를 부활시키기 위한 비상조치였다. 제로금리는 물론 중앙은행이 나서서 금융회사에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자금을 공급했다. 기업들로 하여금 저금리로 돈을 빌려 생산.투자를 늘리게 하고 개인들에게는 예금 위주의 자금운용에서 벗어나 주식 등 자산구입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포문은 일은의 후쿠이 도시히코(福井俊彦.사진(左))총재가 먼저 열었다.

그는 11일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연말에 걸쳐 플러스로 돌아서고 그 이후에도 플러스 기조가 정착될 가능성이 크다"며 "현재의 양적 완화정책은 어디까지나 비상수단이며 그런 이상한 정책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순 없다"고 강조했다. 이르면 내년 봄에라도 해제하겠다는 강한 의욕을 내비친 것이다.

일은이 걱정하는 것은 돈줄을 조일 시기를 놓칠 경우 거품이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플레에 대한 걱정이 별로 없을 때 정책을 바꿔야 나중에 성급히 긴축정책으로 전환해 시장의 혼란을 일으키는 일이 없을 것이란 주장이다. 일은에 따르면 올해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8년 만에 증가세로 돌아서 0.1%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내년도 0.5%를 예상하고 있다.

그러자 정부와 정치권이 발끈하고 나섰다.

집권 자민당의 나카가와 히데나오(中川秀直.사진) 정조회장은 13일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디플레를 방치해놓고 재정 재건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며 "재정 재건의 1번 타자는 일은에 의한 디플레 탈피"라고 강조했다. 양적 완화 해제 후에 발생할 금리 오름세가 국채 이자의 부담으로 이어져 재정 재건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란 주장이다. 여기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도 "(해제는) 아직 이르다. 물가상승률이 확실하게 제로 이상이 안되면 안된다. 아직 디플레 상황이다"고 이례적으로 일은을 견제했다.

일본 정부로서는 1997년 경기가 다소 회복세에 접어들자 소비세를 인상해 경기회복에 찬물을 끼얹은 기억이 또렷이 남아있다. 따라서 확실하게 디플레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현 정책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권의 역풍이 거세지자 후쿠이 총재는 18일 "물가안정 하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에서 (정부와) 인식의 차이는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든 사람이 디플레가 끝났다고 인식하는 때까지 (정책 변화를) 미루면 그 후의 반동으로 대단한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조기 해제론을 재차 역설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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