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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호로 통하는 사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신생아 보러왔습니다. 산모이름은 마*숙인데요』『이름으론 몰라요. 신생아번호가 뭐죠.』
마스크로 온통 얼굴을 가린 간호원의 금속성음성이 차갑다.
S법원 150-98-744.
결혼5년만에 김*호씨(33·서울압구정동369)가 작년4월 얻은 첫아들 원근군이 신생아번호.
태어나 첫울음도 울기전에 발목에 번호표가 붙는다. 사람은 제먹을 것을 타고난다는 옛말은 이제 번호를 달고나온다로 바뀔 판이다.
1주일뒤 출생신고와 함께 받은 원근군의 주민등록번호는 830403-1******.
이번호는 죽을때까지 아니 죽은뒤까지도 원근군을 대신하게될 것이다. 지난달 20일 이*의씨(29·회사원·서울 합정동)는 난데없는 세금벼락을 맞았다.
발송 마포세무서장, 근로소득세추가분 58만6천3백35원 고지서.
세무서를 찾아가 의의를 제기했으나 『컴퓨터처리에의한 발급통보』라는 퉁명스런 대답에 세금남부종용만 받고 돌아왔다.
이씨는 고지서에 적힌 사업장코드번호를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세금벼락보다도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됐다.
동번이인. 자신과 똑같은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장*승씨(29·울산시 장형동)를 찾아낸 것.
540213-1******. 이씨와 장씨의 주민등록번호는 「1인1번호여야 한다』는 주민등록법규정의 예외였다. 그예외가 아닌밤에 홍두께격의 해프닝을 연출했던 것이다.
회사원 전*국씨(36·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의 하루는 번호에서 시작되어 번호로 끝난다.
상오7시23분. 통근버스에 오른 전씨는 오늘도 예외없이 승차권을 내보인다.
운전사는 167번이란 승차권번호와 사진을 대조한다. 이름은 보지도 않는다.
8시5분회사에 도착한다. 책상위엔 그날 처리해야될 각종 「번호」문서들이 수북하다.
『공장4(라인번호)/10752(기계번호)/3(벨트번호) 교체. 43(여자스타킹)/l200(상자)/14(컨테이너) 적재확인. 11(선사번호)/250(타래수) 공급.』
설명은 없다. 번호만으로 의미가 통하고 업무가 처리된다.
입사4년째인 전씨는 자신의 업무에 관련된 갖가지 「번호」를 외는데 꼬박9개월이 걸렸다.
『7950673』하오3시 경리부창구에 자신의 사원고유번호를 댄다. 신분증확인과 사인을 받는다. 창구직원은 컴퓨터용지 한 장을 내준다.
『7950673 전*국 월급액42만7천2백12원』전씨는 사무실 아래층 은행으로 간다. 2157∼002887∼10, 은행신용카드번호를 청구서에 적어 예금통장·월급용지와함께 낸다. 현금대신 일련번호의 가계수표용지가 나온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 전씨는 수표번호를 수첩에 옮겨적어둔다. 하오7시20분. 퇴근길에 전씨는 회사앞 스탠드바에서 동료직원들과 어울린다.
『12번 123』12번코너 담당웨이트리스가 반쯤 비워진 진술병을 가져온다. 그 12번은 술보관함번호. 123은 열쇠다이얼번호. 하오10시. 바를 나선 전씨는 버스정류장에서 83번 버스를 2대보낸 다음 83-1버스를 탄다. 83번을 타면 내려서 더 걸어야하기때문에 버스번호도 눈여겨 보아야한다.
번호. 번호, 번호…. 번호는 우리생활의 모든 방면에서 이름을, 인격을 대신해가고 있다. 「사람」이 무의미한 「숫자」의 뒤에 숨어버려는 현대.
무역오퍼상 문*록씨(41·서울 논현동)는 지난9월 싱가포르에서 가방번호를 잊는 바람에 46만4천원을 날렸다.
문씨는 도착첫날 호텔옆 아케이드에서 1백20달러짜리 다어얼서류가방을 사 상담서류·여권·귀중품등을 넣고 잠갔다.
다음날아침 상담상대역을 만난 문씨의 얼굴은 당혹감을 감추지못했다. 가방번호를 잊은것이다.
상담은 진행되지 못했다. 서류가 없어 의견교환만하고 헤어지면서 문씨는 번호없이는 까딱도않는 가방을 『괴물같이 느꼈다.』
『4번』『20번』『1번』『2번』『6번』
3일 하오2시 서울 종로2가 코아빌딩앞 화단-.
고교생으로 보이는 두여학생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암부호로 대화를 나누며 깔깔댄다.
젊은이들사이에 요즘 유행하는 『AB(영어로 생략) 대화』
4번은 『웬일이니』, 20번 『우리엄마가 너같이 못생긴 아이하고는 놀지말래』, 1번 『흥』, 2번 『졌다』, 6번은 『지구를 떠나라』
글자수를 번호로 나타낸것. 이름을 대신하는 번호가 말자체를 대신 하는 지경까지 접근하고있는 현상이다.
호스티스경력 2년째인 김*자양(21·서울 불광동G맥주홀)은 직장에서 0번아가씨로 통한다. 본명을 아는 사람은 단짝친구 1, 2명밖에 없다.
고향인 경기도에서 가출, 호스티스로 나선뒤 지미숙·진미아등 가명을 썼지만 이름보다는 번호. 업소에서는 0번으로 불려야 더빨리 통한다.
G맥주홀에 있는 호스티스 30여명중 60%는 번호를, 40%는 가명을 쓴다.
이들에게 번호는 밤에만 갈아입는 허물과 같은 것이다.
호스티스를 주제로한 「O×365일」이란 제목의 영화는 직업의 수치스러움을 가려주는 번호의 익명성을 나타낸 셈이다.
고대신문방송학과 홍기선교수는 오늘날과 같은 번호사회의 출현을 『현대사회의 디지틀문화에 기인된것』이라고 진단한다.
초침의 움직임에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던 애널로그문화가 번호판을 보고 현재의 시간만을 확인하는 정보의 디지틀화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
홍교수는 『번호의 간략성·통계성·대표성등을 무시할수는 없지만 번호가 대신하는 실체의 고유한 냄새나 성격·독특성이 말살된다면 결국 실체는 번호의 익명성속에 유령화할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해 2월 부친장례를 치르고 과장으로 승진한 이*성씨(34·서울 방학동)는 『부친묘자리가 명당인덕분』이라고 자랑한다.
이씨의 부친묘는 Y공원묘지가3 묘역936호다. <엄주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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