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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APEC폐막] 실천 뒤따라야 진짜 '아태 공동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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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정수 중앙일보 경제연구소장

"APEC이 구제불능의 무의미한 것으로 남느냐의 고비를 맞고 있다(APEC is balanced on the brink of terminal irrelevance)."

2005 APEC이 열리기 전부터의 우려였다.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며 잔치를 준비해 온 이들로서는 짐짓 외면하고 싶은 '찬물'이었다.

이제 세계 경제의 6할과 세계 무역의 절반을 좌지우지하는 21개 아시아.태평양 나라 지도자들의 13번째 모임이 끝났다. 이번 모임으로 APEC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2005 APEC은 개최 전의 기대에 부응할 만큼 정상들의 그전 어느 모임보다도 많은 성과를 냈다.

IT 강국으로서의 우리 산업 발전상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6자회담 등 한반도 평화 정착 노력에 대한 지지가 이어지는 등 '회원국' 한국으로서 많은 것을 얻었다. 또 '무역 및 투자의 완전한 자유화'라는 보고르 목표 달성을 위한 '부산 로드맵'과 수년간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DDA협상(다자간 무역협상)의 실질적 진전을 촉구하는 특별성명이 채택된 것은 주최국으로서 한국과 APEC이 이룩한 값진 성과다. 그런데 아태지역과 세계 경제의 번영뿐만 아니라 동북아 평화에 기여할 이런 큼직큼직한 성과를 접하면서도 '잔치 뒤의 허탈' 이상의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어렵사리 자리를 같이한 세계의 지도자들에게 걸었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이리라. 아니, 아무런 구속력도 없는 정상들의 모임에서 너무 크고 많은 것을 기대한 것부터 무리였는지 모르겠다.

열여섯 해를 거쳐온 APEC은 이번 모임에서도 예의 두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DDA협상 등 세계가 다 같이 자유화하자는 다자주의를 지지하면서도 끼리끼리 또는 양국 간 교역을 자유화하는 자유무역협정(FTA)이 가장 성행해 온 데가 APEC 지역이다. 보고르 목표를 향해 각 회원국이 자율적으로 무역자유화하자는 말을 하면서도 우루과이라운드(UR.지난번 다자간 무역협상)에서 합의한 이상으로 나아가는 데는 가장 인색한 곳도 이 지역이다. 또한 APEC 지역은 세계 어느 곳보다 자유로운 무역환경과 세계화의 혜택을 입고 성장을 거듭해 온 지역인데도 여전히 개방과 세계화가 안겨주는 '폐해'에 많은 지도자의 관심이 모아지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번 회의도 표면적으로는 아태지역의 번영을 위한 무역.투자 자유화가 핵심 논의사항으로 돼 있지만, 정작 회의장 안에서는 지역 번영에 부차적이거나 개별 회원국과 관련된 잡다한 현안을 다루기에 급급했다.

지역의 공동번영에 대한 이런 상황과 인식으로는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라는 이번 회의의 전체 주제에 상응하는 공동의 고민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아시아.태평양 공동체(Asia Pacific Community)'가 어떤 경제.사회로의 변화를 염두에 둔 공동체인지, 그런 공동체 구축을 위해 어떤 공동의 노력을 어떤 과정을 거쳐 이끌어내야 하는지 등의 논의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는지 모른다.

실체가 이러하니 "APEC이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평가가 당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체성의 위기가 계속되는 속에서 무용론이 해가 갈수록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내년엔 하노이에서 만나요

APEC 정상회의를 마친 21개국 정상이 19일 오후 부산 동백섬 누리마루 APEC 하우스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내년 APEC 정상회의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다. 부산 =김춘식 기자 <cyjbj@joongang.co.kr>

뒷줄 왼쪽부터 비센테 폭스 멕시코 대통령, 헬렌 클라크 뉴질랜드 총리, 마이클 토머스 소마레 파푸아뉴기니 총리, 알레한드로 톨레도 페루 대통령, 폴 마틴 캐나다 총리,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탁신 친나왓 태국 총리, 린신이 전 대만 경제부 장관,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앞줄 왼쪽부터 존 하워드 호주 총리, 하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쩐 득 르엉 베트남 국가주석, 노무현 대통령, 리카르도 라고스 에스코바르 칠레 대통령, 압둘라 바다위 말레이시아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 도널드 창 홍콩 행정장관.

그 정체성은 APEC이란 모임을 갖게 된 그 초심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초심은 명확하다. 유럽통합에 버금가는, 아니 개방적 경제통합을 통해 유럽통합을 뛰어넘는 수준 높은 통합을 이룩하자는 게 그것이다.

그래서 최종 비전인 아태공동체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보고르 목표로 내디딘 것이다. 우선 역내 회원국 간에 아무런 장애 없이 무역과 투자가 이뤄지도록 보고르 목표를 달성하고, 그 바탕위에 아시아.태평양 경제공동체를 만들며, 이를 정치.외교.사회적 통합으로 승화시켜 아시아.태평양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다.

APEC 회원 각국이 선진국은 2010년까지 (한국은 분명히 선진국이다!), 개도국은 2020년까지 무역과 투자의 완전한 자유화를 이루겠다는 것을 공허한 말이 아닌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줄 때 비로소 APEC은 그 존재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김정수 중앙일보 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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