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의 한해. 83년의 교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위격과 위기의 한해가 저문다. 단순한 마년의 끝막음이 새로운역사의 장을 열어줄리 없지만 우리둘은 모두가 어서 이 해로부터 멀어지기를 원한다. 그것은 끔찍하고 비통하고 개탄스런 기억들 때문이다.
우리를 크나큰 시험에 들게했던 그 유례없는 사건들은 결국 시간과 함께 속절없이 지나가고 그것들이 남긴 깊은 상처조차도 언젠가는 아물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것은그 많은 충격과 사건들이 어떻게해서 가능했고, 그것들이 몰아온 위기적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모자람이 없었던가를 돌아보는 일이다. 그것은 괴로운 기억들이나 시간과 함께 흘려버릴수 없는 기억이기도하다.
크나큰 사회적 충격이나 사건을 당할때마다 사람들은 흔히「경험은 있되 교훈이 없음」을 개탄한다. 우리는 올해 유난히도 많은 경험을 겪게 되었지만 그것들로부터 참된 교훈을 얻어내는 지혜가 모자란다면 그런 경험은 언제나 반복될수 있음도 깨달아야한다.
충격과 파란이 휩쓸고간 흔적에서 우리가 건져내야할 교훈들은 너무도많다. 나라경제의 뿌리를 흔들었던 대형 금융사고들은 우리 모두가 추구해마지않는 삶의 질적 개선이, 전혀 다른목적으로,전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한 수단으로 추구되는 뿌리깊은 부패구조의 한 면모를 드러내었다.그것들은 단순한 금융사고도 아니었고, 구시대의 유물로만 치부할수도 없으며, 더더구나 과도기의 혼란 탓으로 돌릴수만도 없는 사건이다.
그것들은 엄연히 오늘 우리의 문제이며, 오늘의 경제·사회적 풍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 뿌리의 소재를 제대로 찾지 못하거나 찾기를 외면한다면 이런류의 사고는 언제 재발할지 모른다.
2백69명의 무고한 인명을 산화시긴 대한항공기 격추사건이나 나라의 요인들을 모해한 버마암살폭파사건들은 모두가 이 지구상에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지향이나 공동선과는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여존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했다.
그것은 우리를 분노케하는 경험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와 유사한 가치를 지향하는 더많은 사람들과의 연대감을 강화하는 자연스런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지구촌에는 도처에서 이와 유사한 분치의 상극, 이념의 대결이 그 어느때보다 첨예화하고 있는 현실도눈여겨 보게 되었다. 격화된 적대와 대결이 혹은 종교적인, 혹은 이념적인 것일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민족주의나 패권주의, 또는 구시대적 제국주의에서도 비롯됨을 보게 되었다.
이런 다양한 적대의 확산은 이 시대를 위기의 시대로 규정할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냈다. 아무리 낙관적인 기록자들 조차 이 시대를 평화의 시대로 기록하지는 못할것이다. 테러와 음모, 살상과 침략이 그 어느때보다 광범하게 확산된 오늘의 세계는 분명 반이성, 반문화, 반이상의 세계로 치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긴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인간의 끈질긴 생존 본능과 최후의 이성을 아직도 신뢰한다. 그래서 이보다 몇배 더한 절대절명의 위기조차 끈기 있게 극복해온 역사를 내세운다. 대결과적대 는 언제나 타협과 협조로 극복될수밖에 없음을 낙관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축복이며 위안이다.
그러나 오늘의 긴장과 위기는 역사상 그 어느때보다 가공할만한 군비로 무장된 긴장이며 또 그 어느때보다 통제되거나 절제되기 어려운 취약한 제도아래서의 긴장인데서 의기의 본질을 읽을수 있다.
경제적으로, 외교적으로 우리는 불가피하게 세계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런 외적상황을 주체적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게 조건지워져 있다. 비록 그것이 많은 제약과 한계를 안고 있는것이라해도 세계와의 연대 아래서 우리는 우리의 몫을 해내야한다. KAL기사건과 버마사건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돌아보면 올해는 매우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1차 해금과 일본수상의 방한으로 시작된 연초는 많은 기대에 부풀게한 출발이었지만 잇달아 터져나온 대형 사고는 우리를 분노와 비탄과 좌절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우리는 곧 이어 그것들로부터 일어설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보여주었다.
가난과 고초를 통해 우리 경제의 근원적 문제들이 어디에 도사리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우리의 외교적 허점이 어디에 있었고, 긴장과 대결의 와중에서 우리가 얼마나 불안정한 균형의 한 모퉁이에 서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위기의 관리 능력이 어느 정도며 어디에 취약점이 있었던가도 짐작하게되었다.
이런것들은 모두 올해의 교훈이 될수 있는것들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는 9%가 넘는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안정기조의 정착을 위해 노력한 결과 25년만에 도매물가의 하락을 기록할수 있었고 우려되었던 수출조차 목표를 넘어 달성했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의 반재력의 한 표현일수 밖에 없다. 위기에 강한 우리의 면모를 보여준결과로 자긍할만한 충분한 자료들이다.
올해 우리가 얻을수 있었던 가장 큰교훈은 그러나 이런 물질적인 성과와는 다른 성질의 것인지도 모른다.
고난과 충격의 극복 과정에서 우리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하는것은 진정한 국민적 화합이란것을 알게 된것이다.
그것은 외적위기에만 대응하는 물리적 단합이나 정략에 근거한 야합이아닌 정의와 이성으로 뭉친 참된 화합이라야함을 알게 되었다. 시련의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취해진 복학과 복권조치는 이런 뜻에서 크나큰 진전이며 새로운 화합의 시발이 될수 있을 것이다
소외되고 그늘에 가려진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화합의 광장으로 함께 모으는 일은 새해에도 변함없이 더욱 과감하게 추진될것을 기대하는 바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