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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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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국 고유 의상인 두루마기는 '평등'을 상징하는 옷이다. 신분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가 입는다. 남자 것은 예복이며 여자 것은 방한용이다. 아이들을 위한 다섯 색깔 까치두루마기도 있다.

그렇다고 두루마기가 처음부터 사랑받은 것은 아니었다. 조선조 양반 사대부들은 두루마기 대신 소매가 치렁치렁하고 길이도 긴 도포나 중치막을 입었다. 도포는 뒤트임을 내고 그 위에 한 폭의 전삼을 덮는데 전삼이 바람에 우아하게 펄럭이는 풍류를 양반들은 즐겼다. 중치막 역시 소매가 넓고 양 옆이 트인 세 자락 옷이었다. 상민들은 도포나 중치막을 입는 게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두루마기를 웃옷으로 입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와서 금기가 깨졌다. 상민은 물론 천민층에까지 도포가 유행했다.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이런 풍조를 개탄할 정도였다.

복식 허례의 도가 지나치자 고종은 1884년 복제 개혁을 단행, 넓은 소매 옷들을 모조리 금지시켰다. 양반들도 트임 없이 '두루 막힌' 두루마기를 입어야 했다. 입어보니 훨씬 편했다. 금세 두루마기는 통상 예복이 됐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 복식에 담긴 신분 상징성을 퇴색시켜 신분제 철폐를 가속화하는 디딤돌이 됐다.

두루마기의 일반화에는 조끼의 등장도 한몫했다. 양반들은 도포 소매에 주머니를 만들어 물건을 지녔는데 양복에서 비롯된 조끼가 보급되면서 양쪽 주머니가 도포 주머니 역할 이상을 해낸 것이다.

내친 김에 고종은 검은색 두루마기를 장려했다. 흰색이 비경제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1903년에는 옅은색 두루마기를 아예 금지하고 검은색만 입도록 했다. 분명 '오버'였다. 포졸들이 길을 막고 검은 두루마기가 아니면 통과시키지 않았고 흰 옷에 먹칠을 하기도 했다. 이 같은 조치는 단발령만큼이나 민심을 들끓게 했다. 곳곳에서 충돌이 빚어지고 소란이 일었다. "국모(명성황후)의 원수도 갚지 못했는데 흰 상복을 벗는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상소가 올라온 뒤에야 단속이 느슨해졌다고 황현의 '매천야록'은 전한다.

아태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마친 정상들이 일곱 색 두루마기를 입고 기념촬영을 했다. 국제사회에서 평등의 정신까지 기대하긴 어렵다 해도 무릇 모든 문제를 순리대로 풀어야지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하다는 진리를 정상들이 되새기길 기대한다면 지나친 바람일까.

이훈범 주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