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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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병이 손님처렴 찾아왔다 좀체로 자리보고 누울 만큼 앓는 일이 없어 그저 가벼운 감기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지내다가 물도 못 넘길 지경이 되어 병원을 찾았다. 무섭게 부어올라 하얗게 꼶은 목안을 들여다본 의사의, 절대 휴식이 자신 없으면 아예 수술을 하자는 으름장에 나는 이제부터 아플테다, 선언하고 본격적인 환자 노릇에 들어갔다.
병원에 다녀오고 시간 맞춰 약먹고 열재고 하는 일 외에는 움직이지 않기로 한것이다. 어쩌다 울리는 전화벨 소리도 제풀에 끊기도록 내버려두고 딩동, 초인종 울리는 소리에도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나는 「병」이라는 특별한 상태이므로 일상적으로 주어지는 일들을 하고 움직이며 살아가던 「나」에게서 한번쯤 빠져 나와보려는 의식이 작용한 탓일까 조용한 동네인데다 오전 중에는 비여있게 마련인 집이어서 나는 한없는 적요로움을 줄기며 창으로 흘러드는 햇빛과 햇빛속에 떠도는 먼지를 멍하니 바라보고, 병은 정신과 육체를 해방시킨다는 이상한 평안함과 충족감에 자신을 맡기기도 했다. 사람들의 꽉 짜인 일정표에「앓기」의 항목은 들어있지 않고, 누구나 평생 앓는 일이 없는 사람은 없을진대, 인생의 시간을 일과 놀이와 휴식으로 나눌뿐 병의 몫은 계산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은 항상 「예기치 않은 어떤 것」이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삶의 여분 같은 것이기도, 난처한 궤도이탈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철저히 앓기 위해(의사는 철저한 휴식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두서없이 떠오르고 빠지는 사념들을 무심히 흘려보내고 약기운에 취해 잠을 자고 꿈을 꾸고 깨어서는 역시 아무런 목적도 부담도 없이, 마음이 바빠 언젠가 한껏 게으름을 부리며 천천히 읽으리라고 서가에 꽂은채 손대지 못했던 「장·그르니에」의 아름다운 산문집과「알랭」의 에세이들을 읽었다. 케르겔렌군도의 안개와 마음속의 보로메 섬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저마다 타버린 재를 두고 우는 시늉을 하기보다 자기의 장작개비에 불을 붙인다면><애정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욕망 자체도 그대로 오래 가는 것은 참된 감정이란 노력의 열매다>등등, 아무렇게나 펼쳐 본 페이지의 곳곳에서 만나는 아름답고 명징한 글귀들을 시를 읽듯 한껏 천천히 음미하며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예기치 않은 병, 병의 한껏 게으를 수 있는 특권 덕이 아니였는지. 그러나 천성적으로 타고난 여유라는 게 내겐 고작 1주일이 한계인가, 아니면 내게 허용되는 자유와 무책임이 그뿐일까. 나는 1주일째 되는 날 꿈도 없이 길고 깊은 낮잠에서 깨어나며 병이 완전히 물러갔음을 알았다.
자리걷이를 하고 방안의 습하고 탁한 공기를 갈기 위해 창을 열었을때 낮게 가라앉은 하늘과 벌써 저물기 시작하는 황량한 들판에서 연을 날리는 아이들, 거친바람을 타고 쓸쓸히 멀어져가는 연을 보았다. 내가 생활에서 떠나있던 1주일동안 겨울이 깊어진 것이다.
서둘러 불을 켜며 나는 휴식을 끝냈다는, 어쩌면 먼 여행에서 갓 돌아온듯 묘하게 서먹하고 낯설고 신선한 기분에 감겨「몸이나 아파야 휴가지」하던, 항상 일에 쫓기는 친구의 푸념을 떠올리며 별반 고달플것도 없는 생활이건만 불치나 난치의 병만 아니라면 그저 견딜만한 정도의 아픔이라면, l년에 한차례쯤 앓는 상태, 한껏 물러서서 게으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도 괜찮으리라는 객적은 생각도 해보았다 하긴 허무하게 한해를 보내버렸다는 초조감과, 어쩔수 없이 남게 마련인 회한이 퇴귀처럼 나를 몰아붙여 나는 자기방어의 수단으로 병을 구실삼아 자신을 피신시킨 것인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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