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젠 시민이다 ③

스마트 시대, 신시민의 탄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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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시민은 ‘도시’라는 거점에서 파생된 공간적 개념이다. 그러나 시민은 봉건제 해체 시기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역사적 개념이기도 하다. 기록에 의하면 16세기 서유럽 도시 이주자의 경제적 삶은 봉건체제의 농노보다 열악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농노들은 경작지를 등지고 도시로 대거 탈주한다. 신분적 속박을 벗어나 자유인이 되고자 해서였다. 자유에 대한 열망이 이처럼 확고했기에 그들은 시민혁명의 최전선에서 인권 신장, 참정권 확대 및 사회정의의 실현을 계도하는 ‘공중(public)’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시민활동에 지대한 역할을 끼친 것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공적 토론에 부쳐 협의하는 ‘공론장’이다.

그러나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매스미디어의 등장으로 직접적 의사소통에 의존하던 공론장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유통되는 정보가 양적으로 증가하고 질적으로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매스미디어가 각계각처로 파급됨으로써 ‘시민이 곧 국민’인 시민의 전국화 시대가 열렸다. 반면 송신자가 구독자나 시청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일방적 소통으로 시민은 미디어나 그 배후 세력에 조종되거나 조작당하는 무력한 ‘대중(mass)’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뉴미디어가 속출하는 최근에 이르러 시민은 단순한 수용자 입장을 벗어나 발신자 역할을 겸하게 되는 새로운 정경이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두고 언론학자 조지 트라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들 발밑에서 거대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정당은 지금도 같은 당명을 사용하고 CBS, NBC, 뉴욕타임스의 명칭도 아직 그대로이나, 시민은 예전의 그 시민이 아니다.”

 더구나 현대사회는 단순한 컴퓨터를 매개로 한 접속 단계를 넘어 스마트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계층이나 직급 혹은 사회인구학적 차이나 공간적 위치와 관계없이 사람들이 스마트 기기로 거침없이 교류하며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 시대는 영리하고 민첩한 영민성을 요한다. 영민성은 불확정성이 가중되는 혼돈의 시대이자 혼돈 극복을 위한 혁신이 강조되는 변혁의 시대와 친화성을 지닌 품성으로, 그것은 변화무쌍한 난세를 요령껏 헤쳐나갈 수 있는 유효한 자질로 간주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역량이나 덕목으로 권장되기까지 한다.

스마트 카드, 스마트 시티, 스마트 라이프, 스마트 복지, 스마트 국가 등 우리 삶에 편익이나 효율을 더해주는 것들에 스마트라는 용어가 부착되고 있음이 바로 그러한 점을 방증한다.

 스마트 시대의 네티즌은 초기 인터넷 시대의 네티즌이 보여주던 연대적 행위와는 구별되는 군집적 행태를 보인다. 강한 개인주의 성향을 동반한 그들은 자신의 판단이나 결정을 중시하면서도 주변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런 양가적 속성을 지닌 무리의 사람들은 계몽시대의 각성된 공중이나 매스미디어 시대의 몽매한 대중과 구별되는 ‘다중(multitude)’으로 불린다. 순간적 결집력에 의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다중은 확고한 목적의식을 결여한 채 느슨한 연결로 엮인 초감성적 집합체로, 어디로 튀고 쏠릴지 행동 방향을 쉽사리 가늠하기 힘든 종잡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근대적 기획이 의문시되고 생활세계가 다변화하면서 시민성을 재정립하자는 문제의식이 고조되고 있다. 환경 파괴나 오염으로 인한 자연적 생존 근거의 박탈, 돌발적 대형 사고로 인한 안전 문제, 전통적 인간관계의 와해와 대안 부재, 기술의존도 증가에 따른 삶의 방향감 상실, 대량소비나 대중문화의 확산에 따른 욕구 과잉, 지구적 차원의 불평등 현상 등은 새로운 시민적 각성과 참여와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요청이 분출되기 시작한 때는 1987년이었다. 87년 6월 항쟁의 여진 속에서 폭발한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운동의 기점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농민운동·교사운동·빈민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이 출현했다. 이 같은 사회운동의 전개와 대응을 통해 시민의 사회참여가 일상화해 ‘생활의 정치’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다.

 고도의 생활 정치가 요구되는 현시점에서 한국사회의 시민은 신(新)시민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이때 스마트 사회가 스마트한 인간을 요청한다면 기피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외면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다. 올드 미디어와 뉴미디어가 교차하는 현대사회의 시민은 여건에 따라 공중이 되기도 하고 대중이 되기도 하며 다중이 될 수 있다. 단 합당한 비판력과 판단력을 견지할 때 시민은 슬기로운 현중(賢衆)이 될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겉똑똑이에 불과한 우중(遇衆)의 상태를 면하기 힘들 것으로 본다. 따라서 ‘작은 일에 분개하는’ 소시민 의식을 벗어나, 멀리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는 성찰적 시민의 양성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