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믿음] 골목과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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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논리로 불행 내몬 건 아닌지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자갈이 깔린 신작로와 논두렁, 골목으로 이어졌다. 버드나무 가로수가 한없이 길게 늘어 선 신작로를 지나 논두렁을 걸을 때 저 멀리 산 아래까지 펼쳐진 보리밭에서 아지랑이가 시나브로 피어오르는 모습은 어린 나이에도 삶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과 의욕을 갖게 했다. 그곳 어디에선가 갑자기 종다리가 지지배배 소리치며 하늘높이 날아올라갈 때면 생명의 막연한 신비감까지 품게 된다.

마을의 작은 골목길로 들어서면 전날 아이들이 놀던 자국들을 밟게 된다. 놀이 종류에 따라 땅에 그어놓은 선들이 가지각색이다. 놀이는 계절마다, 밤낮에 따라, 아이들의 나이와 성별에 따라 다양했다. 비록 가진 것은 고무줄 몇 미터이거나 한두 개의 연과 실 등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그것에 의해 움직이는 활동량과 느끼는 기쁨은 대단했다. 그것도 없으면 돌 몇 개 주워서 길바닥에 이리저리 선을 긋는 것으로도 신나게 놀기에 충분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그림자가 길어지면 이집 저집에서 여인들이 나와서 놀이에 심취한 아이들을 불러들여갔다. 저녁을 먹고 어두워지면 다수의 남자 아이들이 집을 나와 두 편으로 패를 갈라 온 골목을 헤집고 다니면서 술래잡기 놀이로 시끄럽게 하기 일쑤였다. 마을 공터와 골목은 한마디로 아이들의 신나는 놀이터였다. 이런 놀이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녀석이 골목대장이다. 골목대장은 아이들이 서로 공정하게 패를 가르고 규칙을 지켜 즐거운 놀이가 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그의 존재는 모든 아이들로부터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 골목대장은 고정된 특정인이 아니었다. 그날 놀이에 참가한 아이들 중 최고 연장자가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 오늘날 어른이 되어 어릴 때 살던 마을로 다시 가보면 돌담이 이어지던 골목길들은 깨끗이 정비되고 시멘트로 포장까지 되어 있다. 그와 더불어 아이들이 그어놓은 선들도, 재잘거림도, 대를 이어 전해오던 아이들의 놀이·정서·언어·문화도 사라지고 말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자동차뿐이다.

한국 사람의 85%가 산다는 도시의 골목 풍광은 어떠할까.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자동차뿐이다. 주인공이어야 할 아이들은 온데간데없고, 말없는 집들 사이에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이러다가 도시가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좀 더 잘 살고, 좀 더 좋은 조건들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밤낮없이 서양문물을 배우고 일하며 노심초사 살아왔건만, 결과는 어떠한가. 골목에서 마음껏 뛰놀면서 자연과 사람, 자신과 동무들을 알고 관계맺음을 해야 할 아이들을 좁은 실내공간에서 밤낮없이 이것저것 엄청난 양의 배울 거리들에 시달리도록 하면서 치열한 경쟁의 세계로 몰아넣고 있지 않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쟁에 뒤쳐져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는 논리로 그들을 이미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는 아이들에게 안정되고 평화로운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쏟아 부은 엄청난 노력의 방향에 대해 진솔하게 점검해 보아야 할 때를 맞이한 것 같다. 그러한 노력 덕분에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난 세상을 살게 된 것에 대해서는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잃어버린 수많은 긍정적인 것들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아서는 안 되리라. 아이들의 놀이터이던 골목길을 각종 자동차들이 메우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무엇인가 크게 잘못 생각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재조명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골목에서 아이들이 다시 주인공이 되어 신나게 뛰노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

전헌호 신부전헌호 서울 가톨릭대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석·박사 학위(신학)를 받았다. 현재 인간과 영성연구소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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