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18. ‘6·3 사태’ 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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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버리 브런디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도쿄올림픽 준비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1964년 5월 24일 일본을 방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나는 일본의 올림픽 준비 상황을 둘러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본의 스포츠 인프라를 접한 내 심정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전자계기실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일본은 경기장 등 올림픽 시설을 확보하는데 당시 우리 돈으로 165억9000만원 정도를 투자했다고 한다. 10만 명을 수용한다는 메인스타디움과 세계 최고 규모를 자랑한다는 국립수영경기장을 비롯, 도쿄를 중심으로 지어진 모든 경기장이 자동전광판 등 초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스포츠과학을 보았다. 인터벌 트레이닝, 웨이트 트레이닝, 텔레미터와 근전도 테스트, 트레드밀 등 낯선 용어와 개념을 그곳에서 처음 접했다. 과거의 올림픽은 '힘'과 '기(技)'와 '미(美)'의 제전이었다. 현대 올림픽은 과학을 더했다. 일본은 선수의 맥박과 호흡 횟수까지 분석, 경기력 향상에 활용하는 스포츠과학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일본의 스포츠는 대중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지방의 작은 마을에도 체육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모든 경기장 면적은 58만 평. 국민 한 명당 0.2평에 불과했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나는 우리나라 스포츠의 중흥과 현대화를 위해 사생활은 접어 두기로 다짐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눈썹이 타들어가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인간사는 오묘해서 바쁠수록 발목잡는 일이 많은 법이다. 1964년 6월 3일. 그해 3월부터 본격화된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역사는 이 일을 '6.3 사태'라고 기록했다. 계엄령으로 모든 대표선수 훈련과 체육행사가 금지됐다. 나로서는 펄쩍 뛸 일이었다. 이런 가운데 에버리 브런디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브런디지 위원장은 미국 일리노이대 출신으로 한때 육상선수로도 활약했다. 52년 제5대 IOC 위원장에 취임해 72년까지 20년간 올림픽 지도자로 활동했다. '미스터 아마추어'로 불릴 만큼 올림픽의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하기 위해 스포츠계에 만연한 상업주의와 투쟁했다. 그는 47년 한국의 IOC 가입을 주선하고 지지했다. 63년 남북한의 올림픽 동시 참가 문제가 거론됐을 때는 "한국은 종전대로 '코리아'라는 명칭과 태극기를 사용할 수 있다. 북한은 '노스 코리아'란 지역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역사와 정세를 보는 혜안을 지닌 사람이었다.

나는 브런디지 위원장의 방한을 계기로 중단된 대표선수 훈련을 재개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계엄사령관을 만나 담판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안 되면 대통령을 만날 생각이었다. 4일 오후 김종열씨에게 계엄부사령관인 김계원 중장을 만나 보도록 했다. 이튿날에는 내가 직접 민기식 계엄사령관을 방문했다. 거기서 나는 요구했다. "관혼상제와 종교 집회가 순수하듯이 올림픽을 향한 스포츠 행사도 순수하지 않은가. 스포츠 활동만은 계엄령을 풀어 주시오."

민 계엄사령관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소화 불량 환자들에게 적당한 운동이 필요한 것 아니냐. 국내의 정치적 불행도 스포츠를 통해 용해할 수 있다"는 나의 호소를 받아들였다. 6.3 계엄선포 엿새 뒤인 9일 우수 선수 강화 훈련이 정상화됐다. 사격훈련이 재개됐고 선수 선발대회와 기록대회, 국제경기대회를 다시 열 수 있게 됐다. 이렇게 해 도쿄올림픽을 향한 나의 달음박질은 가까스로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고 있었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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