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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조류 인플루엔자),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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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중세에 서구를 황폐화시킨 흑사병 이후 인류에 닥친 가장 큰 재앙은 1918년 세계를 순식간에 휩쓸었던 이른바 '스페인 독감'이었다. 인플루엔자의 대유행은 지난 300년 동안 10여 차례 반복되었으며, 지루한 살육전이 되풀이된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난데없이 나타난 스페인 독감은 1차 세계대전 자체보다도 더 많은 2000만 내지 4000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100만 명의 희생을 불렀던 마지막 대유행인 68년 홍콩 독감으로부터 40년 가까이 된 지금, 우리는 새로운 대유행이 다가오는 것을 여러 징후를 통해 직감하고 있다.

역사적인 경험으로 우리는 인플루엔자의 대유행이 10~40년마다 반복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뿐 아니라 지금 나타나고 있는 여러 징조나 징후들은 스페인 독감 유행과의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지금 동남아를 위시해 유라시아.아프리카까지도 확산되고 있는 무서운 AI 바이러스 H5N1도 조류에서의 매우 강한 독성과 전염력 등 비슷한 점이 많다. 97년 홍콩에서 사람에 감염을 일으킨 이래 지금까지 125명이 감염돼 64명이 사망하여 50% 이상의 매우 높은 치명률을 나타내며, 1억 마리 이상의 가금류가 죽거나 살처분됐다.

H5N1은 최근 수년간 변이를 통해 숙주 범위와 독성이 커지고 있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건강한 어린이나 청소년이라는 것도 당시와 공통점이다. 감염된 조류나 그 분비물 및 오염된 표면에 직접 접촉함으로써 감염되나, 다행히도 사람이 조류에서 직접 감염되는 일은 아직 드문 일이다. 스페인 독감과 한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현재의 AI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전파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이다. 사람 사이 전파의 경우에도 대부분 직접 접촉에 의한 감염이며, 따라서 현재의 바이러스는 대규모의 유행을 일으킬 능력은 아직 없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계속적인 유전적 변이를 통해 사람 사이의 호흡기 전파를 가능하게 할 가능성이 예상된다. 이것은 결국 대유행(pandemic)으로 이어지는 매우 비관적인 시나리오지만, 불가피한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물론 이런 세계적인 대유행에 대한 1차적인 방어수단은 AI에 대한 백신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를 막아낼 효과적인 백신은 아직 없고, 몇 가지 백신 후보가 임상시험 단계에 있다. 대유행 전까지도 효과적인 백신을 준비하지 못할 가능성도 많다. 우리나라도 백신 개발과 생산을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백신 개발이 미진한 가운데 당장 환자가 발생할 경우 치료와 예방을 위한 약으로는 타미플루 등 항바이러스제가 실험적으로 효과가 있으며, 세계보건기구(WHO) 등 국제기구나 여러 나라에서 비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상당량을 확보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고 있으나, 훨씬 더 많은 물량 확보가 필요하다. 또 이 약의 사용.분배 계획과 오.남용 방지책도 정부 차원에서 수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타미플루를 대규모로 사용할 경우 내성의 확산이나 부작용 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수도 있다.

과연 AI의 세계적 대유행은 오는가? 세계 대부분의 전문가는 대유행은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다만 그 시기가 몇 달, 혹은 몇 년 후가 될지는 모르지만, 준비하고 있는 나라에 그 시기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최강원 서울대 의대 교수·내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