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지관이 「소한국사관」부채질|정문연학술대회 박성수씨 발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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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해방이후 오늘까지 막상막하의 대립속에서서 서로 주장을 굽히지 않고있는「소한국사관」그것 「대한국사관」.
박성수씨(국사편찬위원회편사실장)는 한국사에 있어서의 사관문제로서 이들 두 민족사관의 뿌리와 전망을 살피고 있다(12일2∼3일 정문연83년도 학술대회).
그동안 민족사 서술에서 대체로 한반도 중심의 소한국사관이 우세했으나 대륙중심의 대한국사관이 절멸된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한 박씨는 일제침략의 충격속에서 후자가 전자를 압도하는 역전현상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한다.
일제하에서 대한사관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는 단제신채호는 최후의 대륙국가인처전가보여 발해의 멸망을 민족수난가의 기작이요 약소국가로의 후퇴라고 개단, 다시금 왕년의 강대국이 되기위해선 우리역사를 되찾아야한다고 강조한바있다.
단재는 그의『독사신논』 (l908년) 『조선상고사』 (1931년) 에서 기부식류의 소한국사관을 비판하고 『삼국사기』 때문에 우리 민족사는 크게 왜곡되기 시작했다고 단정했다.
그 영향하에 조선초, 특히 세종조의 관찬사서들은 고조선을 조선왕조의 역사적 정통을 사실화하면서도 그강역 문제에선 한반도논을 고집, 민족의 고토인 대륙땅을 포기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하나의 국시처럼 되어 우리나라가 일찌기 삼천리가 아닌, 만리대국이었다는 주장은 억압받게 됐다는것이다.
박씨는 이처럼 압록강 이북의 땅과 그 역사는 우리의 민족사와 무관하다는 사대주의 이론과 더불어 우리역사는 「삼국시대」 부터가 사실이고 그이전의 역사는 전설의 세계라고 보는 일제시민사관이 우리의 역사의식을 왜곡시켰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미 18세기 실학자들이 이같은 소한국주의의 부당성을 지적했던 점을 중시할 필요가있다고 주장한다.
박씨는 여기서 우리 민족사 서술의 전통속에 춘추필법보다 주자의 강목필법이, 객관적인 역사서술보다 주관적인 역사의 포폄(포폄)이 강조돼왔다는 사실을 반성해야 된다고 강조한다.
이는 조선왕조 후기 당쟁의 역사와도 밀접히 관련돼있는 문제로서 당색이 다른 인물엔 철저한 비만을 가해 악인으로만들어 매장해버리는 습성이 발전한 것으로 본다.
박씨는 민족사관의 정립문제는 민족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의 기조를 이루는 것이지만 사관문제로 도리어 지난날의 당갱적 상황이 재연되는 사태는 경계해야 할것이라고 강조한다.

<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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