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칼럼] '통일지상주의'신화서 깨어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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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러한 혼돈은 국가와 공동체가 지향하는 목표나 이념 사이에 존재하는 엄연한 차이를 외면하고 우선순위를 무시한 채 모두를 한통속에 넣고 흔드는 정치적 작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통일.민주.안보.평화.복지.성장.분배.정의 등 모두를 한꺼번에 추구하는 '뒤죽박죽형'의 미숙한 자세가 너무나 오랫동안 한국 정치에서는 허용돼 왔다. 그러한 잘못된 관행은 '좋은 것은 모두 내가 하겠다'고 내세우는 것이 가장 많은 국민의 지지를 얻는 지름길이란 원시적 욕심과 계산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른 한편, 특수한 역사인식이나 이념 성향에 따라 의도적으로 대중을 호도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예를 들면 통일지상주의가 민주화.복지화.반세계화 등과도 유기적으로 연계될 수 있다는 맹목적인 주장이 실증적 설명 없이 종교적 신조처럼 유포되는 것을 주변에서 자주 봐 오지 않았는가.

이러한 국가 목표와 정치이념의 혼돈이 초래한 '뒤죽박죽'의 대가가 얼마나 크고 심각한지에 대한 반성과 지적이 근래 들어 여러 곳에서 대두되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보수성향이나 진보성향이란 이념의 스펙트럼을 넘어 많은 지성인이 우리 사회의 이념적 혼돈과 공백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진지하게 시도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최장집 교수의 통일과 평화, 민주주의의 관계를 한국 현실에 맞게 정의하려는 노력을 주목한다.

한마디로 통일지상주의의 신화나 꿈으로부터 빨리 깨어나야 한국의 민주화는 제대로 진전될 수 있다는 것이 최 교수의 주장이다. 통일에 궁극적인 가치를 두는 민족주의적 역사관은 냉전반공주의에 바탕을 둔 분단국가 건설, 권위주의 국가에 의한 산업화와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 민중의 출현에 의한 민주화 성취, 그리고 남북한 간의 사회구조와 발전 정도의 극심한 비대칭적 차이 등이 가져온 문제들을 함께 이해할 수 없으며 그로부터 발생하는 위기와 갈등을 해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한국현대사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상황은 남북한 사이의 경제 발전 수준, 사회 역량, 정치 안정성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커다란 격차를 만들었다는 최 교수의 진단은 지극히 타당하고 예리하다. 이렇듯 남북 간에 뚜렷한 격차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조급히 시도되는 통일은 폭력적 사태나 극심한 고통을 초래할 수 있다고 그는 경고한다.

통일지상주의에서 야기되는 문제도 결국은 정치이념이나 과도한 목표의 단순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통일의 추구가 평화를 깨뜨릴 수도 있고, 평화를 위한 노력이 통일을 지연시킬 수도 있다는 단순한 논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통일이 민주화를 보장하지 못하며 민주화가 통일을 수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통일.평화.민주란 이념이나 목표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우선순위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분명한 것은 평화는 통일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이라고 최 교수는 단언한다. 더욱이 대부분의 국민은 자유와 민주가 통일보다 우선하는 가치이며 절대로 희생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오늘의 정치적 공백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국가목표에 대한 정확한 이념 설정과 우선순위 선택을 폭넓은 국민적 대화를 통해, 그리고 최대한의 국민적 합의를 통해 이룩하는 작업이 시급히 선행돼야 한다. 보수든 진보든 구시대적 교조주의의 족쇄를 과감히 풀고 민주화의 완성과 갈등 해소를 위해 대다수의 국민이 이해할 수 있고 실현 가능한 지표를 제시하는 지도자와 정치집단의 부상을 역사는 기다리고 있다.

이홍구 중앙일보사 고문·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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